미닝리 단편소설
양희는 덤블링 팬더즈가 자비를 들여서 낸 불후의 인디 앨범이 대실패를 하고 밴드가 해체된 이후에도 가수를 포기할 수 없어 이런저런 오디션을 전전했다. 하지만 가수가 되고 말고는 개인이 포기할 수 있는지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목소리가 좋으니 콜센터라도 해보라며 누가 추천해준 상담원 자리에서 얼떨결에 시작한 것이 어느덧 양희의 이력과 경력이 되었다. 같은 콜센터 업무라도 텔레마케터, 그러니까 매출과 실적이 있는 쪽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는 있었지만 양희는 단순히 걸려온 전화에 대처하는 인바운드 상담 업무 쪽이 더 적성에 맞았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팔거나 권유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처음에 받은 월급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연차가 쌓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상담원들은 여성이 많았고 관리자들은 남성이 많았다. 가끔 이 사회의 성 역할 구분은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의문을 품을 때도 있었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콜 앞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각자 맡은 기능을 하는 톱니바퀴일 뿐이어서 그런 의문을 오래 품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양희도 지금보다 어릴 때는 팀원들과 어울려 하하호호 무용담과 에피소드를 떠들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콜을 받는 시간 외에는 왠지 말 자체를 하기가 싫어졌다. 팀 내에서 점차 말수가 적어지고 함께 어울리는 시간도 줄어들자 팀장의 눈에서도 멀어졌다. 그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젊고 경력이 짧은 상담원들이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난이도가 높은 악성 고객들을 양희가 도맡기 시작했다. 급기야 회사에 소비자보호팀이 신설되자 양희는 그 팀으로 발령이 났다. 말이 소비자보호팀이지 악성 중의 악성 민원인, 블랙 중의 블랙 컨슈머들을 전담 마크하는 팀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콜센터 상담원을 괴롭히는 악질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집요한 기술은 그 정신으로 다른 일을 했으면 뭐라도 큰 인물이 되었겠다 싶을 정도였다. 욕을 해놓고 습관성 혼잣말일 뿐이라지 않나, 대놓고 성희롱을 해놓고 너한테 한 얘기가 아니라지 않나. 그들 앞에 대응 매뉴얼은 무용지물이었다. 양희의 정신은 나날이 피폐해졌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없었다.
그날도 교묘하게 법과 녹취를 피해 가는 욕설과 성희롱, 억지 요구와 인신공격이 집요하게 반복되다가 급기야 주소를 불러달라며 당장 찾아와서 칼로 찌르겠다는 협박까지 듣고 나니 마음이 심란하여 오후 반차를 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왠지 인생의 덧없음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향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가까운 마포대교로 향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어떤 상황이든 대교 위에서 본 풍경은 아름다웠다. 대교 위를 하염없이 서성이고 있으면 누군가 따뜻한 걱정과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주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상상에 사로잡혀 걷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견상근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늘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개를 대신 보낸 건가.
"댕댕이 오랜만이네."
"냥이, 어디야?"
순간 흠칫했다. 얘가 혹시 나를 어디서 CCTV로 보고 있나.
"나 마포대교야."
"거기서 뭐해?"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사실 엄청나게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 갑자기 전화로 쏟아내고 싶진 않았다. 잠시 대답을 고르고 있자 뭔가 낌새를 챘는지 상근이 먼저 말했다.
"설마 위험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글쎄. 세상이 나한테 빠져 죽으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진짜로 빠져 죽을 생각은 없네. 다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좀 걷고 있어."
"그럼 이쪽으로 와. 나기도 같이 있어."
"와, 나기까지? 뭐야, 전설의 덤블링 팬더즈 재결합 현장이야?"
"지금 니가 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어."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너무나 명쾌한 해답을 주는 상근의 답변. 만국의 콜센터 상담원들이여, 본받으라!
"바로 간다! 딱 기다려!"
하늘 저편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양희의 마음은 반대로 맑아졌다.
오늘은 위기일발의 고양이를 개가 구했네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