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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Oct 27. 2021

파도의 모서리 1. 오리배

Wave 1. 봄날의 해일

★ 2024 스토리움 추천스토리 선정작(한국콘텐츠진흥원)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절반은 사라진 것 같다.


 석 달쯤 지났을 때 유봄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쩌면 절반보다 훨씬 많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리가 없었다. 물론 쉽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긴 했다. 그리고 만나더라도 쉽게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도 했다. 유봄은 배터리가 없어 꺼져버린 휴대전화를 흘깃 바라보며 가족과 친구들, 그러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이 세상 어디선가 무사하기를,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하지만 지금은 역시 사람보다 물이 더 절실했다. 계절은 한여름.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가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것을 느끼며 유봄은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오리배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무려 이틀째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이렇게 사방에 넘치는 게 물인데! 그 어디에도 유봄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었다.


 오늘 아침에는 기어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다 못해 찢어질 것만 같은 갈증을 견디지 못해 그만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렸던 것 같다. 모든 생활상식과 생존본능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딱 한 모금만! 그러니까 딱 한 모금만 목을 축이겠다는 간절한 생각 하나뿐이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오리배 밖의 바다를 바라보다 이성을 잃고 그만 물을 한 컵 떠버렸다. 새하얀 스타벅스 텀블러 안에 담겨 있으니 더 그럴듯해 보였다. 아아, 시원한 프라푸치노를 먹어본 게 언제였던가.


 벌컥!


 짜디짠 바닷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며 집 나간 이성도 함께 돌아왔다. 당장 뱉어야 한다. 뱉어내야 살 수 있다! 그렇게 한참을 구역질한 뒤 유봄에게 남은 것은 아까보다 체감상 몇 배 이상 고통스러워진 갈증이었다. 결국 유봄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페달을 밟아야만 했다.


 저 멀리 반쯤 물에 잠긴 뾰족한 건축물이 보였다. 한때 국내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던 롯데타워였다. 지금은 마치 먼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곳에만 도착하면 그 몇 층에서든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이 아니라면 자판기의 음료수라도. 그리고 운이 좋다면 약간의 음식도. 어쩌면 옷가지도 새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가 걸린 와중에도 점점 탐욕스러워지는 상상력으로 옷을 갈아입을 생각까지 하다니. 애써 피식 웃으며 유봄은 페달을 계속 밟았다.


 그날 이후 여러 달째 갈아입지 못해 땀과 바닷물로 절어 있는 티셔츠와 반바지는 인권침해 그 자체였다. 아무리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다지만 아직 롯데타워에는 없는 게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다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친절하기를 바랄 뿐.


 그나저나 서울에서 수평선을 보게 될 줄이야. 유봄의 오리배는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망설임 없이 분명한 직선을 그리며 전진했다.



Wave 1. 봄날의 해일




 3개월 전, 유봄은 집 앞에서 ‘따릉이’를 빌리고 있었다. 따릉이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무인 자전거 대여 서비스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 곳곳에 비치되어 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 유봄 또래의 친구들이 애용하고 있었다. 특히나 유봄은 자전거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교통수단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빙하가 녹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으니까.


 휴대전화 카메라로 자전거의 QR코드를 인식하자 달칵하고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여한 자전거를 영원히 반납할 수 없게 될 줄은 몰랐다. 유봄은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좌우로 살랑살랑 휘청이던 자전거는 금방 속도가 붙으며 싱그러운 봄바람을 선물했다.


 한강공원으로 라이딩을 나갈 생각이었다. 군대에서 모처럼 휴가를 나온 한동을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의 휴가인데 하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유봄과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시시하기는.


 한동은 동네 친구였다. 유봄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외자였는데 다들 두 사람을 봄이, 동이 하고 불렀다. 유봄은 한동과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녔다. 같은 반일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사춘기에는 지나가다 마주치면 서로 데면데면 못 본 척할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이고 한 동네에서 너무 오래 알고 지내왔기 때문에 특별히 이제 와서 이성이다 아니다 의식할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각자 다른 사람과 연애까지 했다. 친하달 것도 안 친하달 것도 없는 그런 사이였다.


 그러다 한동이 군대에 간 후 첫 휴가 때 갑자기 불러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약간은 달라졌다. 그야말로 서럽게 엉엉 울던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이후 휴가 때마다 연락을 해도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만나자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한동은 휴가를 나온 첫날에는 딱히 할 일이 없는 듯했다. 점심때쯤 집에 도착해 주로 점심을 같이 먹자며 불러냈다. 부모님이 맞벌이라 휴가를 나와서 집에 가도 점심은 혼자 먹어야 하는 신세라 했다. 그래서 매번 휴가 때마다 같이 산책도 해주고 분식집도 같이 가주고 가끔은 술도 같이 마셔주고 그랬다. 그중 분식집은 유봄이 즉석 떡볶이를 먹고 싶어서 가자고 한 거였지만. 군인도 요즘은 월급을 많이 받는다며 자꾸 계산을 하려는 한동 때문에 비싼 음식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자꾸 계산을 하려 하면 다시는 보지 않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놨더니 이번 휴가에는 완전히 뜬금없는 계획을 제안해 왔다.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치킨을 사 먹자는 것이었다.


 마침 날씨도 자전거 타기에 딱 좋았고 야외에서 먹는 치킨만큼 유혹적인 음식은 없었기에 홀랑 넘어가버린 유봄이었다. 이러다 언젠가 한동이 고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땐 어떻게 거절할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유봄은 한동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귀는 건 더더욱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언젠가 그날이 닥치면 반드시 거절하고야 말 것이라는 각오 아닌 각오가 마음 한편에 있었다. 그리고 사실 한동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고백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편의점에서 마트에서 지하철에서 일상적으로 너무나 자주 겹치는 동선을 고려한다면 유봄이든 한동이든 고백을 실패했을 때 마주치는 것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컸다. 묘하게 균형 잡혀 있는 관계였다.


 자전거를 타고 두 블록을 지나 한동의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5분 정도 지났지만 아직 아무도 없었다.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온다는 애가.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나오면 등짝을 한 대 후려쳐 줘야겠다고 투덜대며 한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가 가지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을 보니 안테나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신호야, 잡혀라!’ 하는 마음을 담아 의미 없이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늘 보던 풍경이 어딘가 낯설었다.


 잠시 후 유봄은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켜져 있던 신호등의 불빛이 모두 꺼져 있었다. 게다가 주변 간판들의 불빛도 모두 꺼져 있었다. 잠시 후 상가에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며 웅성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서 소리가 나오는지도 알 수 없는 요란한 사이렌이 사방에서 울렸다. 하늘에는 비둘기들이 푸드덕거리며 무리 지어 날고 있었다. 철새도 아니고 비둘기들이 대체 언제부터 단체 생활을 하기 시작한 거지? 아니, 그 이전에 요즘 비둘기들이 저렇게 높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채 가늠하기도 전에 이미 주위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짙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게 발생한 건가 싶었다. 지구 온난화로 매년 더 강력한 태풍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그것은 태풍이라기에는 그 모양이 어딘가 낯설었다. 곧이어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폭포 소리가 진동했다. 유봄은 그제야 그것이 태풍이나 구름이 아님을 깨달았다.


 엄청난 속도로 굉음과 수증기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파트보다 더 높은 해일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서울 자전거 '따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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