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1. 봄날의 해일
유봄은 그 옛날 언젠가 아빠와 함께 갔던 워터파크의 파도풀에서 장엄한 음향 효과와 함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도 달랑 구명조끼 하나에 의존한 채 이리저리 흩날리는 게 너무나 무서워 아빠 손을 꼭 잡았었는데 이건 그때의 공포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서울 한복판에 해일이라니!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해일은 마치 땅을 뿌리째 뽑을 것 같은 기세로 자동차나 가로수는 물론 고층 건물들마저 거칠게 쓸어 담으며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아파트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면서 철근 같은 것이 휘어지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유봄은 무작정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도로에는 차량들이 해일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위해 서로 엉켜 경적을 빵빵 울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유봄이 보기에 해일은 도로 위에서 다툴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의 속도로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위협적인 사이렌이 울리며 모든 시민들은 튼튼한 건물의 고층이나 높은 야산으로 즉시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걸 듣고 나서 대피하기에는 꽤나 늦은 경고방송이었다. 유봄은 잠시 가까운 건물로 뛰어들어 갈까도 고민했지만 이미 해일이 아파트를 무너뜨리면서 오는 광경을 본 터라 어지간한 건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유봄의 동네는 아직 재개발이 되지 않은 곳이 많아 고층 아파트가 별로 없었다. 인근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들을 거슬러 건물 옥상으로 역주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봄은 힘껏 페달을 밟으며 생각했다. 여기서 뒤돌아보거나 망설이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장애물 없이 자전거를 타고 해일의 반대 방향으로 달릴 수 있는 방법이 뭐지? 그렇다! 한강을 따라 강변의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거다. 유봄은 한강공원 표지판을 확인하고 곧바로 자전거를 꺾었다. 원래 한동과 함께 자전거를 타려고 했던 뚝섬 한강공원이었다.
유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만으로 상황을 유추했다.
“어떡해! 못 피할 것 같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으며 유봄은 더욱 격렬하게 페달을 밟았다. 어찌나 세게 밟았던지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유봄은 마지막 순간까지 공황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결심이었다.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울든 말든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포기하고 울다가 죽느니 살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다 죽는 쪽이 나았다. 죽더라도 희망은 잃지 않은 셈이니까!
폭포 같은 소리가 무섭도록 가까워졌을 때 유봄의 눈에 뚝섬 유원지의 오리배가 들어왔다. 이미 비가 오듯 하늘에서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사태가 임박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봄은 자전거를 길바닥에 던지고 오리배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리배에 다다른 순간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차들을 쓸어 담은 거대한 절벽 같은 파도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워터파크에서 아빠가 해준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파도는 부서질 때 가장 강한 법이야.’
유봄이 오리배에 뛰어들어 의자를 꽉 잡은 순간 파도가 덮쳤다.
출렁!
워터파크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장엄하고 거대한 ‘출렁’이었다. 물이 덮치자 유봄은 숨을 참았고 오리배와 함께 어디론가 높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저 머나먼 캔자스 외딴 시골집에서 토네이도를 타고 집과 함께 날아가던 도로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후 한참 동안 유봄의 오리배는 고장 난 범퍼카처럼 무언가 크고 작은 물체들에 쾅쾅 부딪히며 이리저리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날아다녔다. 유봄의 몸도 사정없이 오리배와 오리배 아닌 것들에 부딪혔지만 필사적으로 오리배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불현듯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이름 모를 국회의원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오리배에 에어백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건가요?’
밀물처럼 덮친 해일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기를 대여섯 번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석양 속에서 유봄이 본 서울의 풍경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망망대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하루의 태양이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저물고 있었다. 태양과 지구가 자아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내가 혹시 죽은 건가?’ 하고 서서히 의심이 들 무렵 유봄의 온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비명을 지르듯 올라왔다.
‘살아 있구나! 확인해 줘서 고마워, 나의 통증들아.’
대체 해수면이 얼마나 높아진 걸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웬만큼 낮은 아파트 높이 이상으로 상승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발 아래 떠다니는 부서진 도시의 잔해들과 물속에 잠긴 아파트를 바라보며 유봄은 매고 있던 가방을 확인했다.
한동과 카페에 갈 때 일회용품을 쓰지 않겠다고 챙긴 스타벅스 텀블러 하나에 라이딩 간식으로 준비한 작은 초콜릿 바 네 개, 선크림과 립밤, 물에 잔뜩 젖어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휴대전화, 그리고 과연 어디서 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지갑 하나. 그게 지금 막 표류를 시작한 유봄이 가진 전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