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1. 봄날의 해일
남극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그 빙하의 별칭은 ‘종말의 빙하(Doomsday Glacier)’였다. 이미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녹고 있었고, 그 빙하가 무너져내리는 순간 연쇄 반응으로 다른 모든 빙하의 붕괴를 가속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종말의 빙하’는 인류 멸망 최후의 저지선과도 같은 역할이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극지방의 빙하는 태양열을 반사시켜 지구의 온도를 지켜주는 파라솔 같은 것이었다. 빙하가 녹으면 태양열을 반사하는 파라솔의 면적이 줄어들어 지구가 더 빨리 뜨거워지고, 지구가 더 빨리 뜨거워지면 더 많은 빙하가 더 빠르게 녹게 된다. 도저히 인류가 멈출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폭주기관차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성향이 강한 종이었다. 지대가 낮은 나라와 도시들이 실제로 물에 잠기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겨우 본격적으로 지구 온난화에 지금이라도 대응해야 한다며 헐레벌떡 나서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몰디브, 파푸아 뉴기니 등 인도양과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이 잠길 때까지만 해도 서로 눈치를 보며 먼저 나서지 않고 있었지만 미국의 뉴욕, 영국의 런던, 중국의 상하이, 한국의 부산 등 주요 국가들의 상징적인 연안 도시들마저 잠기기 시작하자 뒤늦게 서로를 비난하며 비로소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이미 겨울에조차도 빙하는 녹기만 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이제 과학자들은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는 속도가 매년 가속화된다는 연구 결과를 마치 유행처럼 앞다퉈 발표하기 시작했다. 마치 세계 종말을 황급히 예언하는 예언가들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예측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인류에게 남겨진 시간에 대해 낙관론자들은 200~300년이라 얘기했고 비관론자들은 2~3년이라 얘기했다. 하지만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에 도달한 순간 불과 2~3일 만에 지구 전체가 잠길 거라고 주장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비관론자들조차도 그런 절망적인 계산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그들도 인류였으니까.
하지만 인류의 기대나 예상처럼 지구 온난화의 재앙은 서서히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지구는 ‘종말의 빙하’가 완전히 붕괴된 후 단 3일 만에 급격한 대재앙을 맞이해야만 했다. 빙하는 마치 목욕탕의 온탕에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툭 하고 부러지자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단순히 빙하가 녹은 부피만큼만 바닷물이 증가하는 게 아니었다. 물은 온도가 오르면 팽창하면서 부피가 커지는데 지구의 온도가 오르자 바닷물 전체가 팽창하면서 순식간에 지구를 바다 행성으로 만들었다. 갑자기 덮친 해일에 무수한 종들이 수몰되었고 거기엔 물론 인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자연의 힘 앞에서 인류는 단지 무력한 하나의 종에 불과했다.
살아난 유봄이 오리배를 몰아 처음으로 향한 곳은 가장 가까이 보이는 섬이었다. 사실 그곳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섬이 아니라 산이었다. 아차산(峨嵯山). 원래 그런 이름이었다. 이제는 아차도(峨嵯島)라고 불러야 하나. 경사가 완만하고 아이들도 오르기 쉬워 등산 초보들도 많이 찾는 산이었다. 유봄도 어릴 때 종종 아빠를 따라 아차산을 올랐다.
매번 아차산에 오를 때마다 아빠는 아차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는 들려줄 때마다 조금씩 내용이 바뀌긴 했지만 기본 골격은 엇비슷했다. 조선 시대에 앞을 보지 못하는 유명한 점술가가 있었는데 왕이 그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궤짝 속에 쥐 한 마리를 넣어두고 몇 마리가 있느냐고 묻는다.
점술가가 세 마리라고 답하자 왕은 백성을 현혹하는 사기꾼이라며 사형을 명한다. 불쌍한 점술가가 끌려간 이후 뒤늦게 쥐의 뱃속에 새끼가 두 마리 더 들어 있던 것이 발견된다. 왕이 ‘아차!’ 하며 사형 중지를 명했으나 이미 늦어서 처형된 뒤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그가 죽은 장소가 바로 아차산이란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만약 진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 어느덧 성인이 된 유봄의 기억에도 또렷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결국 이 지구도 그런 것 아니었을까.
인류가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린 것이다. 이제 인류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다.
섬에서의 일주일은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가까스로 대피한 난민들이 곳곳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아차산에서 등산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에서부터 해일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긴급히 대피한 인근 주민들까지 유형은 다양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인간적인 도덕률과 가치관을 잃지 않고 있었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버티면 국가와 정부, 소방관과 경찰, 뛰어난 과학자나 엔지니어, 혹은 어딘가 숨어 있을 크고 작은 영웅들이 이 사태에 대한 해법을 찾을 것이고 언젠가 구조대가 올 거라는 희망. 그 희망이 사람들을 하루하루 버틸 수 있게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자원이 너무나 부족했다. 아차산에서 구할 수 있는 생존 물품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은 산 속에서 무언가를 얻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파도에 밀려오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식량이나 물품 따위를 구하고 있었다.
그랬다. 이제 아차산도 나름 섬이 되었다고 파도가 쳤다. 사람들은 주로 해안가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유봄도 다른 사람들처럼 해안가에서 무언가 떠밀려 오면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 뒤지곤 했다. 하지만 가끔 해일에 익사한 시신들이 파도에 쓸려 오는 무서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했다. 유봄은 도저히 시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멀리서 옷가지 비슷한 형체라도 떠내려 오는 것 같으면 애써 전후좌우로 시선을 빗겨 돌리며 정면 응시를 피해야만 했다.
‘출근했던 엄마 아빠는 무사할까?’
‘혹시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진 않을까?’
‘동이는 그날 왜 안 나온 걸까? 어쩌면 무슨 사고를 당해 못 나온 건 아닐까?’
유봄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나뭇가지를 씹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지금 군대만이 유일하게 생존 물자를 확보하고 있어.”
실제로 군용 헬리콥터가 지나다니는 것을 여러 번 볼 수 있었고 그 헬리콥터는 하부에 커다란 짐을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필요한 물자들을 구해 어디론가 수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옷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불을 피우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헬리콥터는 못 본 것인지 못 본 척하는 것인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과연 국가는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생존자에 대한 구조는 진행되고 있는지 사람들은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했지만 모두 가설에 불과할 뿐 그 누구도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모든 휴대전화는 먹통이었고 아차산에는 TV나 컴퓨터도 없었다. 해일이 밀려오던 날 요란하게 울려퍼졌던 대피 방송도 그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갑자기 산등성이 언저리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유봄의 머리에 가장 먼저 스친 단어는 ‘구조대’였다. 드디어 구조대가 온 건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도나도 환호성이 들린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유봄도 그들과 함께 덩달아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숨이 차는 것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환호성의 진원지에 도달했을 때 목격하게 된 풍경은 유봄의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카키색 야상을 입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남자였다.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배터리와 오색 전선, 길쭉한 안테나와 스피커 부속품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그 물건에서 다이얼처럼 생긴 부품을 조심스럽게 돌리자 주파수를 맞출 때 나는 것 같은 불쾌한 잡음이 들렸다.
“춘식 씨, 안테나를 조금만 더 저쪽으로 돌려 봐. 아까는 됐잖아.”
사람들은 그 남자를 춘식 씨라 불렀다. 그가 보이지 않는 전파와 씨름을 하듯 안테나를 조금씩 기울이자 어느 순간 스피커에서 잡음이 사라졌다. 그 자리의 모두가 저절로 숨죽이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이 방송을 듣고 있을 생존자 여러분, 안녕하신가요?”
스피커 너머로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에 아까 유봄이 들었던 것과 같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는 사람마저 있었다.
방송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어린이 전파교실 강사 출신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생존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면서 군인들과도 교신을 시도 중이라고 했다.
“저희 아파트에서 보면 매일 군인들이 보트와 헬기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아마 더 급박한 지역부터 투입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도 조금만 더 힘내시고 저와 함께 수제 무전기도 만들어 보시죠. 누군가 이 방송을 듣고 꼭 저와 교신을 성공하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전자기기 부속품을 이용해 무전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방송이 꺼졌다. 배터리가 나간 것이었다. 춘식 씨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핸드폰 빳데리 남아 있는 분 없나요?”
춘식 씨가 만든 라디오는 휴대전화 배터리를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배터리가 떨어질 때마다 하나씩 자발적으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춘식 씨에게 기부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터지지도 않는 휴대전화 같은 건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큰 쓸모가 없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라디오 방송 쪽이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유봄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놓기가 망설여졌다. 거기에 저장된 사진 앨범 때문이었다. 늦은 밤 마음이 약해지고 절망에 빠지려는 순간에 그래도 잠깐씩 휴대전화를 켜고 엄마 아빠,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보는 것이 유봄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기왕이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내놓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 속의 남자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군인들과 교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자신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물어왔고 오늘 밤 찾아오겠다는 말까지 했다며 흥분된 방송을 했다.
“여러분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꼭 무전기를 만드세요! 저와 교신이 되는 날 제가 군인들과 함께 반드시 구조하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제 실시간 구조현장 중계도 놓치지 마세요!”
춘식 씨가 방송을 들으며 무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재료와 도구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성공하진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춘식 씨를 독려하며 다 같이 작은 재료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해안가로 내려갔다.
방송 때문에 덩달아 흥분된 사람들이 군대 얘기를 하자 유봄도 한동이 생각났다.
“동이라는 제 친구가 군인인데 무사할까요?”
그 말을 듣던 아주머니 하나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남친이 군인이었다면 살아 있을 거야.”
“하지만 휴가 중이었는데요?”
“살아 있다면 복귀했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바보라서요.”
그 말에 모처럼 사람들이 웃었고 유봄은 한동이 남자 친구가 아니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기왕이면 군인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두는 쪽이 조금이나마 안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사실 먹지도 못할 남친의 유무 같은 건 지금의 유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생존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유봄도 사람들을 따라 해안가에 떠내려온 물건 몇 개를 뒤적였지만 마땅한 소득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며 사람들은 다시 춘식 씨 주변으로 모였다. 비록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구조현장 생중계가 궁금했다. 그런데 춘식 씨가 또 다시 배터리가 다 떨어졌음을 알렸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다들 남은 배터리가 없었다. 유봄이 드디어 자신이 낼 차례가 된 건지 망설이고 있던 찰나였다. 춘식 씨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유봄을 지목했다.
“아가씨, 핸드폰 있는 거 다 아는데?”
일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유봄을 돌아봤다. 당황한 유봄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자 바로 옆의 아주머니가 낚아채듯 빼앗았다. 아까 자신과 함께 해안가를 탐색한 그 아주머니였다. 젊은 사람이 이기적이라며 노골적으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다 할 변명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유봄은 그들이 보내는 질타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갑자기 사람이 무서워졌다.
춘식 씨는 유봄의 휴대전화 본체에서 빠르게 배터리를 분리한 뒤 기기는 뒤로 휙 던져버렸다. 유봄은 사람들이 라디오에 주목하는 사이 힘 없이 걸어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자신의 휴대전화를 주워들었다.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을 엄마 아빠의 사진을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강해져야 해.’ 유봄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 순간 라디오가 다시 연결되었다.
“…러분, 조금 전 저희 아파트 옥상에 헬기가 착륙했어요. 그럼 제가 마중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쾅쾅쾅쾅. 무언가 철문 같은 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마중 나가기도 전에 벌써 오셨네요. 그럼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꼼짝 말고 거기 서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교환하며 몸을 라디오로 기울였다. 영상이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하다는 것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악!”
이번에는 퍽퍽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 라디오를 듣던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구조현장에서 들릴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군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전파를 탔다.
“와, 이 새끼 이거, 가지고 있는 장비가 엄청난데?”
뒤이어 이것도 챙겨, 저것도 챙겨 하며 누군가 지시하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익숙한 라디오 속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구해주러 오신 거 맞죠?”
“미친 놈, 그래 보이냐?”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이거 놔!”
“저 만기전역한 예비역 병장이고요. 저 장비들 정말 제가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장비는 우리 통신병들이 더 잘 알아. 사람은 더 필요 없어.”
“제발요!”
남자의 목소리가 절규로 변해갔다.
“이거 놓으라니까!”
“싫어요! 데려가세요!”
탕!
목소리가 잘 안 들려 라디오 가까이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뒤로 물러나게 만들 만큼 큰 소리가 났다. 유봄도 앞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떠밀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건 어떻게 들어도 총소리였다.
“아이 씨, 기분 더럽게 만들고 있어. 이건 또 뭐야? 이 미친 새끼 어디 방송 같은 거 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리고 지직, 단말마처럼 짧은 잡음과 함께 방송이 끝났다. 라디오를 듣던 그 누구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잠깐이나마 희망인 줄 알았던 그것은 결국 절망이라는 이름의 방송이었다. 마음을 먼저 추스른 사람부터 말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 없는 하늘에는 별빛만이 총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