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닝리 Nov 07. 2021

파도의 모서리 4. 개나리

Wave 1. 봄날의 해일


 여전히 당장 먹을 식량을 구하는 것이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유봄은 라이딩 가방에 담아왔던 작은 초콜릿 바를 하나씩 꺼내 사람들 몰래 숨어서 먹어야만 했다. 누가 이기적인 행동이라 비난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자신부터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아차산 정상에서 보이는 물에 잠기지 않은 고층 건물들을 가리키며 저곳에는 아직 먹을 게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그중에는 상가나 사무실도 있고, 오피스텔이나 가정집도 있을 테니 아마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것이 바닷속에 잠긴 아틀란티스 같은 시대에도 물에 잠기지 않는 이 새로운 섬들을 사람들은 ‘부동산(不動山)’이라고 불렀다. 움직이지 않는 산(山). 부동산(不動産)에서 재산을 의미하는 마지막 한자만 산(山)으로 바꾼 것이다. 누가 먼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설명이 그럴듯했다.


 이제 아차산의 사람들은 부동산으로 가고 싶어 했다.

 곳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판자로 뗏목 같은 걸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뗏목을 만든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나무로 만든 뗏목부터 페트병으로 만든 뗏목까지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동산은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유봄의 오리배를 노골적으로 탐내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리배를 보는 시선이 점차 심상치 않아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보면서 유봄은 예감했다. 조만간 여기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한 번은 시험 삼아 유봄이 오리배를 타고 가능한 먼 곳까지 나가려 해 봤지만 그날따라 파도가 워낙 강해서 혼자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 부동산까지 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를 생각했을 때 아무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찾아서 함께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힘을 합쳐서 페달을 밟고, 위급할 때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동료 말이다.


 마침 유봄이 눈여겨 봐둔 사람들이 있었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부모와 같이 있었는데 가족 모두 선량해 보였다.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고 놀아주며 어떻게든 지금의 절망을 이겨내려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 가족은 파도에 떠내려온 옷가지들을 엮어 텐트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오색 천조각이 나뭇가지에 걸려 늘어진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유치원 같았다. 유봄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텐트 근처로 자리를 잡았다. 라디오 사건 이후 사람들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가족들은 근처에 자리 잡은 유봄을 그리 경계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솔직히 유봄이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이 세계에서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그게 유봄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는 생존에 불리했다.


 저녁 무렵 부모가 해안가에 내려갔을 때 유봄은 쪼그리고 앉아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넌 이름이 뭐니?”

 “개나리예요. 홍개나리.”

 “우와, 정말 예쁜 이름이네!”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개나리라면 봄을 상징하는 꽃 아닌가. 그런데 개나리는 노란색인데 성이 홍 씨라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섞으면 주황색이 되는 걸까?


 “언니 이름은 봄이야. 유봄. 우리 같이 놀까?”


 유봄은 개나리와 주변의 재료들로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크고 편평한 돌을 접시 삼아 나뭇잎으로 도우를 만들고 흙으로 반죽을 올린 뒤 예쁜 돌로 장식하니 멋진 피자가 되었다. 풀과 나뭇잎을 갈아 샐러드를 만들고 꽃으로 장식했다. 디저트라며 흙으로 케이크도 만들었다. 유봄도 모처럼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단 한 가지 문제는 하필 소꿉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가짜 음식들을 실컷 만들어 놓고 보니 그렇게 배가 고플 수가 없었다. 그건 개나리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았다.


 “근데 언니, 먹을 거 없어요? 배가 너무 고파요.”


 그 표정과 눈망울이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 유봄은 굳은 결심을 하고 마지막 남은 초콜릿 바를 꺼내 아이에게 줬다. 그러자 아이의 표정이 확 하고 밝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고 배꼽인사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아이의 얼굴이 노을에 물들어 주황빛으로 따스하게 빛났다.


 그래.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에 이 가족들과 함께 떠나자고 제안해봐야겠다.






 그날 밤 습격이 있었다.


 나무에 기댄 채 반쯤 잠들었던 유봄은 갑자기 숨통이 조여 오는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눈앞에 닥친 광경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웬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무 막대기 같은 걸로 유봄의 목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먹을 거 어디 숨겨놨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둑한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개나리의 아빠였다. 바로 옆에는 개나리의 엄마도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망을 보는 것 같은 자세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왜 이러세요?”

 “먹을 거 어디 숨겨놨냐고?”

 “숨겨놓은 거 없어요.”

 “아까 우리 애한테 과자 준 거 다 알아!”

 “그게 마지막 한 개였어요!”

 “거짓말하지 마!”


 유봄은 아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사람들과 함께 여기를 떠나려 했었는데…. 선의로 아이에게 준 달콤한 초콜릿 바가 이렇게나 거친 폭력으로 되돌아오다니! 지금이라도 함께 오리배를 타고 나가려던 계획을 밝히고 이들을 설득해야 할까?


 아니다. 이미 신뢰는 깨졌다. 그것도 무참히 깨졌다. 언제 또 갑자기 돌변할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떠날 수는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크게 다치는 것을 느끼며 유봄은 생존본능으로 재무장했다.


 “저기 저 소나무 뒤에,”


 아이 부모의 시선이 유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인가? 아니다. 아직 아이 아빠의 팔 힘이 느슨하지 않다.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해야 한다, 봄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거기 가방이 하나 묶여 있을 거예요.”

 “당신이 한번 가봐.”


 아이 엄마가 유봄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소나무는 작은 절벽 앞에 있었다. 유봄은 그 소나무에 주워온 가방을 하나 묶어 절벽 쪽으로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숨겨 놓았다. 가방에는 유봄이 며칠 동안 해안가에서 주워 모은 것들을 담겨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생존에 도움이 될까 해서 모아둔 페트병이나 철사 같은 쓰레기들일 뿐 먹을 수 있는 음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즉, 저들이 가방을 열기 전까지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유봄은 손으로 가만히 땅을 만져보았다. 너무 딱딱했다. 그래, 아차산은 바위산이었지. 영화처럼 흙을 눈에 던지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겠군. 이번에는 조용히 눈을 돌려 아이를 찾았다. 저만치 멀리 늘 머물던 곳에서 옷가지를 이불 삼아 잠들어 있는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라식 수술을 안 했으면 어쩔 뻔했는지. 누구라도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지구 멸망에 대비해 좋은 시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아무래도 아이가 깨는 건 싫겠지? 그러니 이렇게 아이가 자는 밤중에 조용히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겠지? 아이의 엄마가 가방을 집어 든 순간 유봄은 최대한 큰소리로 외쳤다.


 “개나리야! 일어나! 너희 아빠가! 켁!”


 유봄은 막대기에 목이 눌려 그 뒷말은 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아빠? 뭐해? 언니?”


 아이가 깬 것이다. 유봄은 눈에 띄게 당황한 아이의 아빠를 강하게 밀치고 몸을 비틀며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아직 인정사정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유봄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오리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의 하산 길이었지만 달리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오리배 도망간다!”


 뒤에서 아이 아빠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들에게 내 정체성은 고작 오리배였던 건가. 잠시 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며 횃불 같은 것이 가로등처럼 하나둘 켜졌다. 그때였다.


 “잡아라!”


 누가 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신호로 모두가 유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유봄은 달리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만의 시대가 열렸다.


 다행히 유봄이 가장 먼저 오리배에 도달했다. 유봄은 나무에 걸어놓은 오리배의 줄을 풀며 눈으로는 뒤쫓아오는 사람들의 속도를 가늠해보았다. 10초 정도 남았을까. 다이빙하듯이 오리배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자전거에 오리배까지, 전생에 페달의 신과 원수를 진 게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페달의 신이시여, 이만 나의 전생을 용서하소서.


 뒤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 물에 뛰어드는 소리, 무언가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돌이었다. 누군가 돌을 던져 오리배의 선체를 계속 맞히고 있었다. 돌아보니 춘식 씨였다. 그 순간 유봄의 얼굴 옆을 돌맹이 하나가 휙 스쳐갔다. 오싹했다. 춘식 씨가 맞히고 싶은 건 오리배가 아니라 바로 유봄 자신이었다. 유봄은 혹여나 돌에 맞을까 봐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아야 했다.


 ‘잘 던지시네요. 전직 야구선수라도 되시나요?’


 파도는 해안가에서 부서질 때 가장 강했다. 처음이 힘들었지 가속도가 붙은 오리배로 10분 정도 역주하고 나자 해안가와 제법 멀어졌다. 그쯤에서 주변의 파도도 잔잔해졌다. 이제 물이 깊어졌다는 뜻이다. 주변은 고요했고 해안가의 불빛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바다에 여기까지 수영을 해서 쫓아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봄도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공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더니 온몸의 칼로리란 칼로리는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예전의 지구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오리배 다이어트 사업을 스타트업 아이템으로 진지하게 검토해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이긴 했지만 유봄은 결국 혼자의 힘으로 섬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긴 언제는 이 세상이 예상대로 굴러가던 때가 있었던가.


 ‘파도를 넘었어.’


 파도 위로 새하얀 달빛이 부서졌다. 슬프고 아름다웠다.


 


>> 다음 편에 계속 >>


강릉 밤바다
이전 03화 파도의 모서리 3. 라디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