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눈에는 다 보이는 사랑의 균형
"엄마, 할머니는 담이만 예뻐하는 것 같아."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봤어!"
둘째가 두 살, 첫째는 다섯 살이었다.
외할머니집에 가자고 하니 첫째가 가기 싫다고 했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할머니가 담이만 예뻐해서 속상하다고 했다. 어떻게 아는지 물었더니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내가 봤어!"
어떤 말로도 아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언니라고 자기한테만 양보하라고 하고, 담이만 예뻐하면서 챙겨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그다음 방문부터 엄마는 똑같이 예뻐해 주려고 노력하셨다.
왜 나는 아이의 표현을 넘길 수 없었을까?
왜 딸아이의 표현에 내 마음처럼 속이 상했을까?
왜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은 다른 걸까?
왜 편애를 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보이는 걸까?
왜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걸까?
왜 있는 그래도 인정했을 때, 오히려 화가 나지 않는 걸까?
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오히려 상처가 될까?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다 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 손길에서 사랑을 느낀다.
"엄마는 왜 맨날 언니 편만 들어?"
"아빠는 왜 내 말은 안 들어줘?"
아이의 눈과 귀는 이미 부모의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
편애란, 공평해야 할 상황에서 특정 아이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는 것이다.
나는 '편애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알지 못했다.
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경험한 편애의 느낌은 아이에게로 흘렀다. 나도 모르게.
내 상처가 아이에게 비칠 때
나를 닮은 자식을 더 예뻐하거나 더 미워하는 부모의 마음은 아이에게 상처를 남긴다.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과 맞닿는 일이었다.
엄마는 4녀 1남의 막내 동생을 아들이라면서 무척 사랑하셨다. 그걸 지켜보는 어린 내 마음은 부족함으로 꽉 찼다. 아들이 아니라서 받을 수 없는 사랑에 억울했다.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건 나서서 해드렸다. 아들보다 내가 낫다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며 살았다.
아이의 "내가 봤어."라는 말이 마치 나 같아서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더 챙기고,
더 살피고,
애써 사랑했던 것 같다.
내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상처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남는 건 '덜 사랑받았다'는 기억
편애는 부모의 의도보다 무의식에서 흘러나온다.
자신이 딸이라서 핍박받았지만, 아들을 예뻐하는 것을 보고 자랐으니
자신도 아들을 낳아 똑같이 아들만 예뻐하는 거다.
혹은 너무 서러워서 아들을 미워하면 딸을 더 편애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는 아이들은 다 안다.
"나는 덜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간다.
편애받은 아이는 언제나 결핍 상태다. 그래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사랑이 고파서 사랑받으려 애를 쓴다.
부모의 기대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
잘해도 당연하고, 못하면 실망시키는 존재라는 부담.
과연 편애에서 자유로운 아이가 있을까?
비교 대신, 존재 자체로.
완벽하게 똑같이 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의식이 무의식을 이길 수는 없으니.
나는 두 아이에게 다르게 대한다. 사실 다르게 대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다른 아이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당연한 건 아닐까?
아이들이 어릴 때 "언제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 하고 물었다.
"안아줄 때"
"사랑한다고 말해 줄 때"
정말 단순했다.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일.
"엄마는 그냥 너라서 좋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편애를 받으면, 편애할 수밖에 없다.
다만 질문을 던지고, 편애의 순간을 알아차릴 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언제나 답은 내 안에 있다. 편애받아서 아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엄마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던 아가였는지를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