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항상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줄리아드 예비학교 오디션에 지원했지만 기대와 다르니 실망이 컸는데 바이올린 선생님이 꼭 줄리아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다른 음악 학교도 생각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생각의 융통성 참 중요하다. 당시 난 줄리아드 학교에만 보내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했다. 그래서 계획과 달리 맨해튼 음악 예비학교에서 오디션을 치렀다. 그렇게 아들과 맨해튼 음악학교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맨해튼에서 상당히 떨어진 롱아일랜드에 살고 아들이 음악 학교에서 공부할 때 나 역시 공부할 무렵이라서 시간에 쫓겨 무척 바쁘지만 아들이 참가하는 필하모닉 공연은 꼭 보러 갔다.
뉴욕에 올 때 아무것도 모르고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뉴욕 문화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아들이 맨해튼 음대에서 공부할 때 오케스트라 공연을 학부형뿐 아니라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한 것을 알아가게 되고 그 후 줄리아드 학교 등에서도 무료 공연이 열리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아들이 맨해튼 음악 예비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난 뉴욕 문화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 후로 점점 뉴욕에 대해 호기심이 커져만 갔고 서점에서 다양한 책을 읽으며 뉴욕 문화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부터 매일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갔다. 줄리아드 학교에서 1년 약 700회 가까운 공연이 열린 것을 알게 되니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음악 학교가 나의 놀이터로 변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천국의 놀이터가 줄리아드 학교가 아닐지. 주말이면 예비학교 학생들 공연이 열리니까 노인들이 자주 찾아와서 공연을 보곤 한다. 심지어 휠체어를 타고 오셔 공연을 보니 감동적이다. 그리니치 빌리지 워싱턴 스퀘어 파크 부근에 사는 백발 할머니도 시내버스를 타고 자주 오셨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 친구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하며 공연 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초등학생을 연상하게 했다. 노인들 대화는 주로 공연과 전시회다. 참으로 한국과 문화가 달라서 놀랍다.
음악을 무척 사랑하는 쉐릴 할머니와 인연이 된 것도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다. 버뮤다에서 어릴 적 이민을 온 할머니는 변호사 외삼촌의 도움으로 쉽게 미국에 오셨고 같은 영어권이라 불편이 적었다고 하셨다. 클라리넷 레슨을 오래 받고, 합창반 활동을 오래 하고, 집안이 음악을 사랑한다고. 음악을 사랑하니 우린 쉽게 친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맨해튼에서 열리는 공연 일정이 적혀있다. 70대 할머니 손글씨도 얼마나 예쁜지. 난 악필인데! 할머니는 뉴욕에서 오래오래 살았지만 크리스티 경매장과 소더비 경매장에 대해서 모르셔 안내를 해 드렸다. 그때는 크리스티는 맛있는 무료 카푸치노도 먹을 수 있으니 정말 매력 넘친 공간이었다. 쉐릴 할머니와 함께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에서 얼마나 자주 공연을 봤는지 몰라. 함께 메트 뮤지엄에도 갔다. 할머니는 뉴욕대에서 열리는 공연도 자주 보시고 스토리텔링 이벤트에도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의 스케줄과 겹쳐 방문하지 못했다. 2년 전인가 링컨 센터에서 헝가리 국립 오페라단 공연이 열렸는데 아주 저렴한 티켓을 구입했다고 하니 할머니도 보고 싶다고 하셔 내가 티켓을 사드렸다. 할머니 생일이니 축하한다고 하면서.
가끔 내가 마법을 부린다. 원래 비싼 티켓인데 내가 저렴하게 구입했고 저렴한 티켓값은 할머니가 냈다. 요즘 코로나 19로 집안에 갇혀 지내니 할머니를 만난 지 꽤 오래되어간다. 연세 드셔 건강이 어떤지 안부가 궁금한데 이메일도 없고 휴대폰도 없으니 연락이 안 된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코로나 전염병이 사라지면 다시 줄리아드 학교에서 만날 것이다.
줄리아드 학교에서 해고당한 변호사도 만났다. 어느 날 변호사 친구분 소개도 공연을 보러 오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눈만 뜨면 로펌에 가서 일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니 뉴욕 문화에 대해 거의 모르셨다. 하지만 미술품을 수집하고 한국 도자기도 수집했다고 하니 놀랐고 피아노 등 몇 개 악기도 다룬다고 하고 운동도 하신다고. 갑자기 해고당할지 몰랐던 눈치였다. 얼핏 보기에 5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그분이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 때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만 공연을 보러 다닐 시간이 없었던 듯 짐작되었다. 매주 목요일 링컨 센터에서 열리는 무료 공연에 대해 안내하고 몇몇 정보를 주니 아주 고마워하셨다. 뉴욕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로펌에 근무하는데 뉴욕 문화를 잘 모르니까 이방인이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다. 물론 매일 나의 열정을 맨해튼에 쏟아붓고 나서 알게 된 귀한 정보다. 단 한분도 내게 뉴욕 문화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아들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도 우리에게 줄리아드 학교 무료 공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맨해튼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사는 할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에서 태어나 콜럼비아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일하다 은퇴했다는 할아버지가 교회 합창단 오디션에 낙방하셔 줄리아드 학교에 오셔 무료 공연에 대해 알았다고 하니 웃었다. 세상에... 줄리아드 학생에게 성악 레슨을 받으러 처음으로 줄리아드 학교에 오셔 우연히 들었다고. 이렇게 뉴욕에 사는 분들을 통해 뉴욕 문화도 알게 된다. 교회 합창단 오디션도 낙방한다고 하니 내게는 놀라움 자체였다. 또 합창단에 합격하기 위해 레슨을 받는 할아버지 얼마나 멋진가!
천재 학생들이 공부하는 줄리아드 학교에서 열리는 대회를 일반인에게 오픈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러 간다. 같은 곡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도 좋기만 하고 내 가슴도 떨린다. 서로 실력이 비슷한 경우도 있고 누가 우승할지 상당히 긴장되는 대회. 줄리아드 학교는 대회가 끝나면 로비에서 바로 발표를 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음악을 듣고 대회가 끝나면 누가 우승하는지 발표를 기다린다.
어느 날 콜럼비아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는 할아버지도 만났다. 그분은 내게 혹시 자녀가 줄리아드 학교에서 공부하냐고 물으셨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음악을 사랑하니 자주 학교에 온다고 하니 웃으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소개를 하셨다. 음악을 사랑하니 시간이 되면 줄리아드 학교에 공연을 보러 오고 콜럼비아 대학 병원에서 일한다고. 꽤 높은 직위인데 매일 아주 많은 환자 룸을 직접 방문하신다고 하셔 감동을 받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환자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될까 해서 방문한다고. 이런 분들이 미국을 위대하게 하지 않나 생각했다. 열정적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분들이 있다. 오래오래 기억나는 분이다.
한국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정경화, 장영주, 강동석)와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장한나)도 줄리아드 학교 출신이다. 줄리아드 학교에서 학생들 공연을 감상할 뿐 아니라 이작 펄만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도 만난다. 처음 이작 펄만인 줄도 몰랐는데 유튜브에 올려진 쉰들러 리스트에 소개된 그분의 목소리와 같아서 눈치를 챘다. 이작 펄만 제자들 공연이 열리면 휠체어를 타고 오신다. 예술인을 가까이서 보게 된 즐거움도 크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음악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이작 펄만도 멋져!
또 학교에서 다양한 공연을 본다. 챔버 축제, 졸업 리사이틀 연주회, 마스터 클래스 등. 유명한 음악가들 마스터 클래스도 일반인에게 오픈하니 얼마나 좋아. 가끔 미리 티켓을 받아야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좋은 기회다. 어느 날 아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갔는데 아주 오래전 맨해튼 음악 예비학교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던 학생을 만났다. 그날 연주가 너무 좋아서 아들에게 훌륭하다고 말했던 피아니스트가 가끔 생각나곤 했는데 줄리아드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감동적인 연주였다.
토요일이면 예비학교 학생들 공연 보고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챔버 공연 등을 감상하는 음악 학교가 그립다. 가끔씩 링컨 센터 앨리스 툴리 홀에서 점심시간 무료 공연이 열린다. 직장인도 점심시간에 찾아와 잠시 공연 보고 돌아간다. 뉴욕 맨해튼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이 많다. 여름 방학을 제외하고 수년 동안 자주 줄리아드 학교에 가서 수많은 공연을 보니까 셀 수 없이 많은 추억이 있다. 명성 높은 음악 학교가 내게 즐거움 가득 주는 놀이터인데 코로나 19로 멈춰버려 몹시 슬프다. 그리운 줄리아드 학교! 빨리 정상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4월과 5월은 정말 많은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데... 아, 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