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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터와 기획자, 그 사이에서

기획 오퍼레이터가 아닌 기획자가 되고 싶다

긴박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긴박한 느낌이 들게 수정해주세요


 입사 후 2개월쯤 됐을 때였다. 24시간 동안만 재고가 한정된 상품을 딜 형태의 상품을 파는 'one-a-day deal' 형태의 매장을 기획하고 있었다. 요청을 발의한 부서인 마케팅 플랫폼 담당자인 차장님은 내 평생 가장 어려운 미션을 주셨다.

 수정 시안만 7번째였나. 긴박한 느낌을 주려고 타이머도 넣어보고, 폭탄 터지는 품절 임박 딱지도 붙여보고, 온갖 디자인을 바꿔보았지만 원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케팅팀의 차장님은 타이머가 째깍대고 구매 수량이 표시되고 긴박한 품절 임박 딱지를 붙이고 빠방 하게 디자인을 구축하면 분명 고객이 긴박한 느낌으로 구매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풋내기 UX기획자였던 나는 매번 와이어프레임을 고치고 담당 디자이너를 괴롭혀가며 시안을 수정했다. 디자이너와 몇 날 며칠을 시안 앞에 둘러앉아 대체 '긴박해 보이는 느낌'이 뭔지 모르겠다고 힘들어했다.

 

니가 해봐라 이놈들아!!!


  결국 힘들게 오픈한 당일!  힘 빡줘서 전시한 패딩 상품의 매출이 쫙쫙 상승 그래프를 타며 올라갔다. 

그런데 원래 다음날 오전 열 시까지 오픈되어있어야 했던 매장은, 밤 열두 시에 뚝하고 닫혀버렸다. 매출도 밤 열두 시에 멈춰버렸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나와 담당 개발자는 두 손을 모으고 IT부문 부문장실에서 고개 숙이고 서있어야 했다. 하루 종일 이 분 저분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다니며 머리를 조아렸다. 요건 변경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까 예정된 오픈 일차가 촉박해서 테스트 시간이 너무나 적었다. 결국 24시간 동안 열리고 닫히는지 충분히 실시간으로 테스트해보지 못했고, 덕분에 미쳐 잡지 못한 오류가 내 발등을 찍었다. 집에 가는 길에 술 먹고 있던 대학 동기들을 찾아가 소주를 연속 몇 잔을 들이켰다. 술냄새 풍기고 집에 가서는 벽에 기대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그 날만이 아니었다. 다음 달 회사의 월례조회 시간, 그 마케팅 차장님은 원데이 딜 매장을 기획해서 매출을 많이 올렸다고 '이달의 사원'표창을 받았다. 난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들고 고민해서 만든 내 새끼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 나는 소유권이 없었다. 

 왜냐하면, 난 기획 오퍼레이터였을 뿐 기획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획자가 오퍼레이터가 되는 순간


  새로 생긴 매장에 대해서 칭찬은 현업이 받고 기획자인 나는 욕만 먹었다. 이 과정에서 뭐가 잘못됐던 걸까?


작던 크던 모든 업무는 프로젝트다. 하지만 현업의 요청이 분명해 보일수록 운영 프로젝트에서  UX기획자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오퍼레이터가 되어 버리기도 쉽다. 이렇게 되면 그저 현업 요청자 대신에 개발 커뮤니케이션만 하는 '아바타'나 '을 작업자'가 되어버린다. 옛날 나의 한 선배는 '길에서 아무나 데려다가 보름만 가르치면 SB(스토리보드)는 만들 수 있다'며 '기획 직무 무용론'을 주장했었다. 기획 직무에 열정이 퐁퐁 솟던 나는 세상이 무너지듯 서운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영혼 없이도 얼마든지 SB(스토리보드)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보통 현업의 요청은 생각보다 명확해 보인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에 타사 서비스도 캡처하고 네모네모를 그려가며 얼추 스케치 수준의 UI도 그려서 온다. 아무 생각 없이 그 화면을 가져다가 잘 정리하고 예외 케이스만 잘 써넣어도 SB인 척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렇게 개발 요청해서 오픈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게다가 신입 기획자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요건 리뷰를 할 때 너무나 확신에 찬 요청자들의 태도다. 확신에 찬 태도에 있으니 순진한 초급 기획자는 논리에 반박하지 못하고 수긍해버린다. 물론 요청했던 사람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UX기획자다운 사고를 하지 못하고 그저 수용해버린다면 UX기획자의 역할은 의미가 없어진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기획자가 아니라 오퍼레이터가 되어버린다.




요청의 이면을 발견하라


 흔한 UX서적에서 '니즈의 분석'에 대한 이야기처럼 현업의 요청이 올 때, 기획자라면 요청의 진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그들이 요청한 그림은 그저 요청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뿐이지 UX적으로도 시스템적으로도 가장 효율적은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 


 예시로 이해해보자.


요청 내용 : 메인에 기획전 배너 구좌(인벤토리)를 넣어주세요

실제 요청사항 : 기획전에 유입을 늘리고 싶어요


 요청 내용은 메인 화면이라 고정되어 있지만 사실 원하는 건 기획전에 대한 유입을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메인에 배너를 넣는 것을 아이디어로 내온 것이다.

 오퍼레이터는 그냥 메인에 배너 구좌를 만드는 것을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진정 서비스/UX기획자라면 그 이유를 파악하고 기획전에 트래픽을 높일 다른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메인이 이 목표에 적합한지 그리고 다른 곳이 왜 더 효과적인지 데이터 증거로 증명할 수 있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니즈를 끌어내는 질문



그러면 그 옛날 날 울린 마케팅 차장님의 요구사항은 어떤 거였을까


요구사항 : 긴박한 느낌으로 디자인해주세요

진짜 요구사항 : 주문이 많이 일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똑같은 말 아니냐고?

 이제는 이 말의 상세 조건을 확인해야 할 시점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 이 매장의 운영구조를 완벽히 확인하는 게 두 번째 단계였다.




 적절한 질문 1 : 이 매장에 들어오는 상품은 어떤 특징이 있어요?


 나중에 운영되면서 느낀 점은 그 매장의 상품은 1+1처럼 벌크가 많아 단가가 할인되거나 특별한 사은품을 대거 제공하는 형태였다. 또한 행사가 잘 없는 유명 브랜드 상품이 많았다.

 매장이 긴박감이 넘친다고 해도 상품도 보지 않고 주문을 하는 고객은 없다. 그렇다면 이 매장이 흥행됐던 것은 한정된 시간에 기존에 없던 혜택을 줬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파악을 하려고 했다면 고객이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들만한 '요소'가 무엇이 있는지부터 분석했어야 했다. 그리고 매장에서 그 요소를 눈에 잘 보이도록 배치했어야 했다. 배치를 하면서 평소 공부한 UI 공식들을 통해 배치나 인터렉션을 만들었어야 했다.



적절한 질문 2 :  장바구니 등에 담는 식으로 구매를 미루지 않고 즉시 구매를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나중에 운영하면서 사은품이 다 소진되어 24시간을 못 채우고 상품을 변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소싱해온 상품의 재고는 거의 무제한일지라도 사은품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청자는 '구매자수'를 강조하면 따라서 살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구매자수가 많다고 나도 빠르게 사야 한다는 생각이 적절한지는 근거가 부족했다. 오히려 홈쇼핑의 사례만 봐도 품절될까 봐 조급 해지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이 아닐까?

 지금의 나라면 '남은 사은품수'를 표시해서 혜택을 받기 위해 빨리 사야 하는 이유를 더 강조했을 것 같다.





오퍼레이터를 벗어나는 '고민'


 동일한 환경에서도 프로를 만드는 작은 차이는 결국 '고민의 깊이'다. 옛 선배의 말처럼 누구나 보름이면 기획자의 문서는 흉내 낼 수 있지만, 기획자의 고민의 깊이는 그 안에 흉내내기 쉬운 게 아니다. 그만큼 고민하는 연습도 필요하고 요청자들의 평소 관심사나 KPI, 업무방식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

 고민의 깊이로 요청자를 수긍시키고 프로세스와 고객 동선까지 설명할 수 있다면  자신의 기획이라고 말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 그 매장은 내가 오퍼레이팅 했을 뿐 기획했다고 말할 수 없다. 매장의 실적도 그 차장님이 만들어냈다는 평가도 적절했을 수 있다. 당시에 나는 서운했지만 내가 한 일은 기획자가 되기 위한 연습의 시간이었다. 

 연차가 쌓여가며 내 고민이 스며든 내 새끼들이 계속 생겨났다. 지금 매장 하나를 만드는 것에 들어가는 기획의 깊이는 당시와 같지 않다. 이런 오퍼레이터의 경험은 기획자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다. 


 혹시 지금 하는 일에서 오퍼레이터의 역할이 더 많은가? 아니면 기획자로서의 역할이 더 많은가? 요건을 제로베이스에서 기획자의 입장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기획자가 되는 첫 발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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