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결혼식을 가면서
직장 동료도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
사원 3년차때였다. 10년을 알츠하이머로 투병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황망해하는 우리 엄마를 대신해서 사회생활하고 있는 내가 자연히 상주가 됐다. 어차피 중환자실때부터 내가 보호자였고 산소호흡기 사용도 내가 결정했고 입퇴원수속도 내 몫이었다.
물론 이런 과정은 너무 당연했다. 억울함도 어려움도 그냥 내몫이었고 그게 그냥 내 상황이었다. 다만 걱정은 누가 올까 걱정됐다. 텅빈 장례식장에 우리끼리 있는 것은 너무 가혹할 것 같았다.
우리 친척과 엄마 손님은 뻔했고 언니는 직업특성상 고정적인 동료도 없었다. IMF때 하던 장사도 접고 친구도 만나지 않고 교회도 다니지 않고 말년에는 오락가락했던 우리 아빠에게 친구는 있을 리 없었다. 하필 토요일이라 부고가 전해지지 않으면 나희 회사손님도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가장 작은 장례식장을 선택했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부터 차곡차곡 정리해둔 연락 목록을 보며 부고를 보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지도 않았다. 난 상주였고 상조회사와 장례식장을 결정해야했고 음식을 판단하고 돈을 계산해야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복받은 사람이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장례식장을 가득 채워주었다. 특히 당시 대표님의 방문과 지금도 함께하는 팀장님의 방문은 특별했다.
정말 모두가 존경하는 대표님이셨던 강현구 대표님은 텅 비어있던 시점에 장례식장에 오셨다. 운전해주시는 과장님과 당시 HR부문 팀장님과 함께 오셔서 썰렁한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1시간 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대표님도 사원시절에 부친상을 당했었고 동생과 어머니와 셋이서 이겨냈단 이야기부터 나에게 목표가 뭐냐고 물어보셨다. 난 내 분야에서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다고 했고 대표님은 응원해주셨다. 대표님은 회사차원이 아니라 다음날 조의금을 한번 더 보내셨다.
신기한 건 그 다음날이었다. 회사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모든 팀장님이 한 분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비상연락망을 돌리셨단다. 심지어 우리 회사분들은 발인과 운구할 때도 와서 도와주셨다. 우리 집에 여자식구만 덜렁 셋이었고 친척은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특히 팀장님은 직접와서 운구도 도와주셨다. 그 다음주 전략회의에서 직원의 장례에 대한 도움의 수준도 높이고 부친상, 모친상의 경우 타 팀장님들도 필참도 지시하셨다고 한다.
회사라는 조직은 어쩌면 사회생활 카테고리에서 남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결국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이 사람을 아껴주는 방법은 엄청난 것이 없다. 아파보일 때 아프냐고 걱정해주고 고마울 때 고맙다고 말하고 멋있을 때 멋있다고 말해주고 누가 비난할 때 보호해주고 이해해주는 것이면 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빛처럼 다가간다.
난 오늘 마음으로 아끼는 예쁜 후배의 결혼식에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혼식에 참석해서 밝게 웃으며 축하해주고 축의금 몇만원을 넣어주는게 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는 회사 동료들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이면 좋겠다. 물론 나도 해봐서 알지만 정신없어서 기억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만.
항상 따뜻한 직장 동료들이 내 인생의 동반자들이였다는 게 고맙게 느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