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뒷풀이 그리고 막걸리
버스에 오르며 김철수 회원이 정회장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모이는 행경 산악회. 오늘도 새벽 7시, 회원들은 하나 둘 집결지에 모여들었다. 서울 도심의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졸음과 기대감이 뒤섞인 회원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친다. 매번 한 총무가 챙겨주는 김밥과 물로 가볍게 배를 채우는게 행경산악회 시작인 셈이다.
"정회장님, 이번에도 막걸리 챙기셨죠?"
"그럼, 내가 언제 빼먹은 적 있었나? 오늘은 특별히 복분자 막걸리도 가져왔다니까."
한 총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회장님, 건강을 위해 시작한 등산인데, 매번 뒤풀이가 과하시다니까요."
"한 총무님, 그래도 우리 산악회가 이렇게 끈끈해진 게 다 정회장님의 막걸리 덕분 아닙니까?" 누군가의 외침에 버스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들은 단순한 등산 모임을 넘어 서로의 인생을 나누는 가족같은 사이가 되어있었다.
"잠깐만요! 매번 하는거지만 이번에도 돌아가면서 기수와 하는일 등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정 회장님부터 시작합니다" 한 총무는 매월 버스가 고속도로에 올라가면 휴게소 도착 전까지 참석한 회원 소개 시간을 가졌고 마지막에는 후니 산악대장이 일어나 산행 코스와 난이도, 시간 등을 소개하고 쉼을 가졌다.
"오늘 산행 코스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 하겠습니다. 최근 비가 많이 와서 중간 지점에 낙석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 지금은 비가 오지 않지만 미끄러움에 조심해야 합니다. 스틱 사용도 반드시 해야 하며, 3개조로 나눠 산행을 할때 조장의 의견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 후니 대장 말씀대로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정상에서 막걸리는 적당히 하시고, 하산 후에도 과하지 않게 해주세요. 지난번처럼 다들 곯아떨어지면 안 됩니다."
한 총무의 말에 모두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지난달 산행 때는 정상에서 마신 막걸리에, 하산 후 백숙집에서 또 한 잔하다가 버스에서 모두 곯아떨어져 기사님께 민폐를 끼쳤던 것이다.
버스가 한 시간쯤 달렸을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볼일을 보고 커피를 마실 분들은 테이크아웃해서 가져왔다. 버스는 다시 출발하고 잠에서 깬 회원들은 오늘 산행과 저번 산행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후니 대장은 식사 중에도 수시로 일기예보를 체크하며 등산로 상태를 점검했다.
후니 대장의 꼼꼼한 체크리스트에 모두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의 이런 세심한 준비성 덕분에 행경 산악회는 지금까지 5년 동안 큰 사고 없이 안전하게 산행을 이어올 수 있었다.
오전 10시,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후니 대장의 지도 아래 체계적인 준비운동을 하고, 각자 장비를 최종 점검했다. 배낭을 메고, 스틱을 손에 든 회원들의 모습이 꽤나 전문적으로 보였다.
"자,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조장님을 중심으로 앞조와 뒷조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써주세요, 특히 길이 미끄러운 구간에서는 스틱을 반드시 사용해 주세요, 중간 휴식 때마다 수분보충 잊지 마세요."
산행이 시작되자 후니 대장은 선두에서 페이스를 조절하며, 중간중간 위험구간을 미리 알려주었다. 정회장은 그의 뒤를 따르며 수시로 낙오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잠깐 쉬면서 물 한 모금 하세요. 중간중간 수분 보충 잊지 마시고요. 후니 대장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것처럼, 탈수는 산에서 가장 위험한 적입니다."
정회장이 앞장서서 걸으며 수시로 회원들을 독려했다. 등산로를 오르는 동안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상쾌했다. 햇살이 더워질 때쯤, 드디어 정상이 보였다.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에 도착한 회원들의 환호성이 산을 울렸다. 후니 대장은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고 안전한 휴식 공간을 지정했다. 정회장은 그제야 배낭에서 준비해온 도시락과 막걸리를 꺼냈다.
"자, 이제 고생한 기념으로 한 잔 하시죠. 근데 한 총무님 말씀대로 적당히만요! 하산이 더 위험하다는 거 다들 아시죠?"
정회장이 막걸리를 따르자 하얀 거품이 종이컵 위로 넘실거렸다. 복분자 막걸리의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준비해 온 과일과 간단한 안주를 나눠 먹으며, 회원들은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막내는 요즘도 취업 준비 중이래요..."
"우리 집 아들도 그래요. 요즘 젊은이들 참 힘들죠."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이 전망 보세요. 이런 걸 보면 세상살이 힘든 것도 다 잊혀지는 것 같아요."
이런 대화들이 오가는 사이, 산악회는 단순한 등산 모임을 넘어 서로의 인생을 함께 걱정하고 도와주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있었다. 한 회원이 아플 때면 모두가 걱정하고,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사이. 그것이 바로 행경산악회만의 특별한 문화였다
정상에서의 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산을 위해 자리를 정리하면서, 후니 대장이 다시 한번 안전수칙을 상기시켰다.
"하산 시에는 더욱 신중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특히 아까 막걸리 드신 분들은 스틱 사용 필수입니다. 그리고 회장님과 총무님이 뒤에서 낙오자 체크하면서 올 테니, 무리하게 속도 내지 마시고 안전하게 내려갑시다."
하산길에서도 후니 대장의 안전 지침은 계속되었다. 미끄러운 구간에서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안전한 하산 방법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모두가 무사히 하산에 성공했고, 버스는 인근의 향토 음식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백숙으로 정했습니다. 다들 괜찮으시죠?"
회원들의 환호성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솔솔 풍기는 닭백숙 냄새에 모두의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총무의 만류가 없어도, 회원들 스스로가 과한 음주는 자제했다.
"회장님과 운영부 덕분에 오늘도 안전하게 산행 잘 마쳤네요."
"맞아요. 우리 산악회가 5년 넘게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운영부들의 안전제일 철칙 덕분이죠."
저녁 7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 이번에는 지난달처럼 곯아떨어진 회원은 없었다. 대신 하루 동안의 산행을 되돌아보며, 다음 달 산행 계획을 세우는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다음 달에는 어디로 갈까요?"
"단풍 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가요!"
"좋죠! 근데 이번엔 복분자 말고 다른 막걸리도 준비해올게요."
정회장의 말에 다시 한번 버스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산을 오르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회원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행경 산악회가 5년 넘게 이어져 온 비결일 것이다.
버스가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처럼, 오늘 하루의 추억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등산과 막걸리, 그리고 뒷풀이.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합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달에는 더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으로 뵐게요!"
후니 대장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오늘의 산행은 끝이 났다. 하지만 행경 산악회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로는 동료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가족으로 서로를 아끼며 걸어온 5년의 시간. 안전과 즐거움, 그리고 그들만의 특별한 정(情)이 어우러진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