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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Muse Oct 19. 2021

마네킹이야? 허수아비야?

강아지들의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투입했습니다

제 강아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슬리퍼를 꼬마 마네킹에 쥐여주었어요.

와인 바를 내기 전에는 적어도 9시 이전에는 집에 자주 들어가서 강아지들이랑 놀아주었는데, 요즘은 그런 여유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저녁 늦게 마감을 하고 다음날 준비를 하거나, 아니면 너무 지쳐 가게에서 한 잔 마시고 들어가는 날에는 강아지들이 깡충 뛰어오르며 반겨주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의 파김치가 되거든요.


그러나 하루 종일 저를 기다린 녀석들 마음이 너무 가엾어서 그런 날은 그냥 말없이 한동안 강아지들이 스스로 제 품을 빠져나갈 때까지 꼭 안아주기만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초코파이 교감이 뭉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지요.

이렇게 초롱초롱 예쁜 눈을 가지고 때론 얌체짓도 하면서 사랑을 받았던 체리는 어느새 눈가에 덥수룩하게 털이 자라나서 노숙견 몰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강아지 사진 인스타에 올리면 차단각이라면서요? 저는 그래서 인스타보다는 브런치가 좋습니다.

14년 된 노견이라서 북어랑 유산균은 열심히 챙겨줍니다만 먹는 것보다 강아지들에겐 사랑을 표현해주고 놀아주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요. 괜히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요. 어쩐지 의기소침한 기운이 역력합니다. 미안... .

요렇게 귀엽던 복슬복슬 코카푸, 제니입니다. 5살 장난꾸러기 강아지예요. 기운은 낙지 먹은 황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천하장사인데다가 성질도 좀 별나서(더럽다는 표현이 더 정확해요) 어디 좋은 자리 시집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냥 '평생 엄마랑 살자' 하고 데리고 삽니다.

제니의 표정 컨셉은 두 가지입니다. '억울하거나, 의심하거나'.

약간 멍청하기도 해서 장난에 잘 속곤 해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 공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잘 노는데요. 삑삑이 공을 입에 물고 '삑삑삑' 구령 맞춰 부르듯 소리 내며 달리기도 하고요.


저녁에 피곤해서 퇴근하면 펄쩍펄쩍 너무 요란스레 달려들어 안아주는 척하면서 안방 문을 활짝 열면 그대로 방 안으로 돌진해버립니다. 저는 문을 얼른 닫아버리지요. 그러면 거기 갇혀서 또 열어달라고 문을 박박 박박! 그런데 열이면 열 번 다 속아넘어가서 문 만 열어주면 방 안으로 들어가서 갇히곤 합니다.

그 백치미, 멍청함이 정말 치명적으로 매력인 강아지예요. 너무 귀여워요. 잘 때 엉덩이를 만지면 눈을 희번덕 거리며 화를 내지만 그러지만 않으면 순둥 순둥 정말 착해요. 호불호가 아주 분명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 착했던 아기도 주인을 자주 못 보니 심성이 비뚤어지는 것 같아요. 저것 보세요. 눈 희번덕증이 도로 나오네요. 전혀 딴 아이가 된 것 같죠.

이건 좀 낫고... .


이건 정말...공포 그 자체의 표정입니다. 혀를 빼 문 것이 더 무섭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망치 모양으로 생기고 번쩍번쩍 불이 들어오는 장난감입니다. 그 장난감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그러다 보면 저 희번덕증이 나오거나 짖거나 하는 거죠. 이웃에 민폐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고안해 낸 방법이 마네킹 허수아비입니다. 체리와 제니 모두 슬리퍼를 무서워해요. 그렇다고 제가 슬리퍼로 때리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어느 날인가 치킨을 먹고 남은 박스를 치우려는데 순간 강아지들이 그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급한 나머지 슬리퍼를 던졌거든요. 일단은 못 먹게 해야 하니까요. 그 이후로 슬리퍼를, 특히 검은색 남자용 슬리퍼를 무서워합니다.


슬리퍼와 함께 평화를 지켜주는 꼬마 마네킹입니다.

어쩌겠나요. 주말에 장난감 가게에 가서 장난감을 하나 더 사줄 때까지는 일단 둘의 전쟁을 막아야 하니 평화 유지군을 투입해야지요. 창고에 있던 마네킹을 꺼내다가 손에 슬리퍼를 쥐여 주었습니다. 적의 적은 내 편이잖아요. 슬리퍼는 서로에게 적인 셈이니 싫든 좋든 동맹을 맺겠지요.

효과는 만점입니다.

오늘은 모처럼 평화와 고요가 깃든 거실에서 오후 햇살을 받아 가며 아마 지금쯤 둘 다 낮잠에 빠져있을 겁니다.

'사랑해, 체리, 제니!

가게 좀 자리 잡히면 휴일에 산에 가서 지치도록 산책 시켜줄게.

늘 한결같은 사랑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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