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며 서있는데 살랑이는 바람이 윤식의 코끝을 스쳤다.
풀냄새에 감춰진 흙냄새가 스며 올라오는 것 같다.
비가 오려나...
하늘을 보니 그새 날이 흐려졌다.
먹구름을 보니 집사람 생각이 난다.
윤식도 조금 전 그 부부 못지않게 싸웠더랬다.
엉엉 우는 아이들도 무시하고 소리치고 부수고...
살아남기 위해 털을 곤두 세운 야생 동물처럼 전쟁 같은 부부싸움이 사는 내내 이어졌다.
특히 그날은...
우리 둘 다 참고 참았던 응어리를 터트려 버린 날이었다.
잔뜩 흐린 날, 그보다 더 잔뜩 흐린 얼굴을 한 집사람이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참 살기 팍팍한 신혼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쥐 몸통보다 큰 한 달 생활비.
빌리고 굶고 빌리고 굶고 모진 생활고를 버티고 버티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며 도망치듯 집을 나가버린 집사람을 찾아 나섰던 그날.
나는 뭐 살기 편해서 아무 말이 없었는 줄 아는가!
죽을힘을 다해도 부족하기만 했다.
아이는 태어났는데 먹을 것, 입힐 것이 부족했다.
속은 썩어가는데 내가 하소연을 시작하면 정말로 이 가정이 무너질 것 같아 가시를 삼키듯 삼켜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속도 없이 나가버리면 내가 어떻게 하라고...
어렵게 당신을 찾아 다시 데려와 또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일 년을 버티고 40년을 버텼다.
때로는 같이 있는 것이 답답해 죽을 것 같다가도, 때로는 그 자리에 있어준 것이 고마운…
당신은 그렇게 나와 40년을 함께 한 원수이자 동반자였다.
멍하니 서있다가 쓰디쓴 기분을 떨쳐내려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버스에 올랐지만 출발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잠시만...
출발하려다 말고 운전석 의자에 기대앉았다.
평생을 쫓기듯 일해 왔으니 이렇게 좀 쉬어도 되겠지.
잠깐 눈을 감고 있으니 바람소리가 들린다.
드르륵, 드르륵.
응?
이건 무슨 소리지?
눈을 떠 고개를 돌리니 버스 앞문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 첫째 아이, 희수가 기르던 고양이가 있었다.
"땅콩이?"
이 놈의 고양이가 버스 문을 다 할퀴어 놨다.
"너 왜 여깄냐?"
고양이가 윤식의 다리에 몸통을 스친다.
살아있을 때에도 기분이 좋으면 늘 식구들 다리에 제 몸을 비벼대며 그르렁거렸다.
"땅콩이 니 벌써...?"
뒷말은 삼켰다.
희수는 퇴근하자마 지 애미 애비는 본체만체하면서도 한참 동안 고양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고양이를 잃은 아이가 어쩌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눈이 큰 희수의 그렁그렁한 눈물이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듯했다.
'허벌라게 울고 있겄구만...'
그렇다고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
이곳에 왔으니 내가 잘 데리고 있어야 첫째도 좋아하겠지.
일단 땅콩이를 안아 올렸다.
마주쳐 오는 그 눈이 참으로 오묘하다.
사람 속을 다 알고 있는 눈 같다.
그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두둑.
"오메, 들어가자!"
땅콩이를 데리고 버스에 들어와 앞자리 의자 한 구석에 담요를 깔았다.
품에서 내려온 고양이는 몇 번 뒤척이며 자세를 잡더니 이내 담요 위에 몸을 말고 주저앉는다.
'고놈 참... 제 자리 찾아온 놈 같네.'
"땅콩아, 근디 희수는 어떻게 하고 와븟냐? 너 온 거 알고는 있냐?"
"......"
"니 온 지는 얼마나 됐냐? 이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모르겄네..."
"......"
"땅콩아......"
땅콩이를 버스에 태우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싫었던가 보다.
대답 없는 고양이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붕 떠 있는 것 같던 마음이 단단히 자리 잡는 느낌이 들었다.
하찮은 고양이 한 마리가 주는 안도감이 생각보다 크구나.
나는 해 질 녘까지 버스를 세워두었다.
비를 뚫고 가도 되겠지만 이대로 좀 있어도 되겠지.
저 고양이 놈도 적응 좀 하고...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차츰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른쪽 의자로 고개를 돌려보니 땅콩이와 눈이 마주쳤다.
"밖에 나가볼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몸을 일으킨 땅콩이를 품에 안고 버스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스쳐지나고, 멀리 구름들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었다.
땅콩이를 잠시 내려놓았다.
고양이는 멀리 가지 않고 버스 근처만 서성이다 윤식의 곁에 돌아왔다.
죽은 후에 해보는 농땡이가 생각보다 달달했다.
하지만 이제 한 곳에 오래 있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그만 출발해야지. 땅콩아 가자!"
그날 저녁, 흐렸던 윤식의 표정은 소나기가 지나간 듯 가벼워져 있었다.
부르릉!
휴식을 마친 정비 버스는 우렁찬 배기음을 토해내며 달렸다.
땅콩이와 달리기를 며칠, 무전 연락이 없어 정비 버스는 도심 근처까지 주행했다.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어둠에 잠긴 캄캄한 새벽.
가로등도 없는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길가에 서있는 저승 버스 한 대를 발견했다.
'저승버스도 부딪히는 가벼?'
버스는 측면 모서리 쪽이 살짝 찌그러져 있었는데, 더 이상한 것은 버스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었다.
정비 버스를 세우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윤식은 흔들리는 버스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히리리이힛힛!"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유후!"
"빗물이 흐르고! 호!"
"호우, 호!"
흔들리는 버스에서 노랫소리가 반주도 없이 생목 라이브로 흘러나오고, 유리창 너머 버스 안에는 십 수명의 망자가 일어나 단체로 춤을 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