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마음의 크기만큼의 포용력을 가진다. 내 속이 좁으면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없고,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이를 품을 수 있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 나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스님들과 조폭들이 사사건건 부딪히며 말썽을 피우자, 큰스님은 밑이 깨진 독에 먼저 물을 가득 채우는 쪽이 이기는 경기를 제안했다.
성급한 조폭들이 고무신에 물을 퍼다 재빨리 부어보지만, 깨진 독에 물이 찰 리 없었다. 그에 반해 스님들은 물 한 방울 담지 않고 본인이 스스로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내 마음이 곧 물"이라 한다. 하지만 진짜 물을 채워야 한다는 큰스님의 말에 당황해하고, 순간 번뜩이는 재치로 조폭들은 웅덩이에 밑이 깨진 항아리를 던져 항아리 가득 물이 차게 했다.
그 모습을 본 큰스님은 크게 흡족해하며, 조폭들이 계속해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고는, 밑 빠진 독을 연못에 던져 물을 가득 채우듯 그저 자신도 그들을 내 마음속에 던져 넣었을 뿐이라는 말을 남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말이다.
어떠한 강요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기대 없이,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용력이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며, 과연 나는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척하고 밀어냈는지 떠올려본다. 껍데기에 쓰인 이름표만으로, 혹은 단편적인 말 한마디만으로, 속을 보지도 않은 채 무시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옹졸한 인간인지 보였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껴안는 일이다. 우리는 대부분 상대를 마주할 때 그의 일생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드러난 단면만을 보고 판단한다. 가끔은 그 순간에 상대가 보인 행동이, 그 사람이 지나온 수많은 사연과 상처의 결말일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내 삶 속의 나의 마음이 물이 되게 하자. 물을 담는 그릇을 키워봐야 그저 물을 담아줄 뿐, 내가 가진 그릇의 모양대로 물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더 좋은 사람, 더 넓은 마음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이라는 그릇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더 크게, 더 깊게, 더 단단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려면 결국 내 안의 물부터 맑고 부드러워야 한다.
그리고 그 물속에 다른 이의 마음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공감이다. 나와 다른 온도, 다른 성질, 다른 흐름을 가진 물이 들어올 수 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감은 동의가 아니라 동행이다. 함께 흐르는 일이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깊은 상처를 주고받은 관계에서는, 포용의 끝에 용서라는 결심이 필요하다. 용서는 잊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내 안에 고요히 가라앉히는 일이다.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고, 물결처럼 품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것마저 내 마음을 조금 더 깊게 만드는 바닥이 되어줄 테니.
나는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사람을 품는다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따지기 전에 그 사람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을 내 안에 담아낼 때마다, 내 마음의 물은 조금 더 깊고 잔잔해진다는 것을.
그러니 오늘 하루는, 나와 다르다고 느껴지는 누군가를 피하지 말고, 그를 내 안에 살며시 담아보자. 물처럼 스며들고, 물처럼 포용해 보자. 그 안에서 내가 몰랐던 나의 마음도 함께 자라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