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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Oct 15. 2020

경험으로서의 집

스물여섯번째 이야기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더니 집의 곳곳이 눈에 거슬린다. 10여년 전에 했던 인테리어 마감재, 가구, 배치가 이제서야 불편하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면 비전공자에 비해 경험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나은 점이 있어야 할 판인데 내가 어찌 살고 있나 돌아보면 그런 면이 하나라도 있나 싶다. 인테리어도 인테리어지만 더 아쉬운 것은 지금 집에 거의 20년째 살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형태의 삶을 경험해봐야 좋은 건축을 할 텐데 말이다. 부모님께 불효지만 이 아쉬움을 가끔 토로한다. 부모님은 한편으로는 공감해주시면서도 이만한 집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하신다. 



그래도 이런 집이라도 있었으니까 너흴 키웠지.



집은 정주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아쉽게도 그 정주가 자본의 논리와 무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다달이 혹은 일시적으로 지급되어야 하는 금액과 ‘만기일’이라는 시간 개념은 공간의 소유와 불가분의 요소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경제 논리로 인해 인간에게 가장 안락한 공간이 되어야 할 집이 언제 박탈될지 모르는 위험성을 내재한 공간이 되었다. 오래된 역사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한 번 집을 사게 되고 정착하면 쉽게 다른 곳으로 이사가지 못하는 듯하다. 



한탄은 이 정도로 하고 다시 ‘다양한 형태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기억나는 정도로만 얘기하자면 나는 복도식 아파트, 1기 신도시 아파트, 기숙사, 학사, 그리고 군대에서 살아봤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가끔 시골로 내려가 지내던 할아버지 댁이 유일한 주택에서의 경험이다.  남의 집을 지어야 할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빈약한 경험이다. 



나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4층에 살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옆 집과 아래층에 동갑내기 친구가 살았다. 날이 좋고 부모님이 집에 계시면 늘 문을 열어 두고 지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옆 집 친구네는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를 거의 닭까지 키워서 그 닭이 열린 문을 넘어 복도를 뛰어다녔다. 닭 잡으러 복도를 같이 뛰어다니던 기억이 선명하다. 1층에는 동생이 다니던 어린이집도 있었다. 언제 한번은 아파트 단지 잔치를 해서 그곳을 떠나 이사를 할 때는 차 타고 가면서 엄청 울었다. 그 아파트는 8살 된 나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친구도, 기억도 모두 그 아파트에 있었다. 


현재 우리는 대부분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는 '집'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부모님의 직장 위치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만 3군데를 다녔다. 그 이후로는 계속 지금의 집에 살고 있다. 반영구적인 정주가 시작됐다. 가구도 하나둘씩 늘어났고, 단지 내에 아는 이웃도 늘어났다. 아파트 두 개 사이에 있던 공터에서 네다섯살 차이나는 형들과 축구도 했다. 나무도 있는데 그 사이를 드리블하며 축구를 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입 준비로 한동안 집을 떠나 생활했다. 그사이 알고 지냈던 이웃들은 또 다시 이사를 갔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위층 할머니는 이제는 내게 아저씨라고 하며 인사하신다. 세월이 그렇게 지나 우리 집이 몇 안 남은 ‘원주민’이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이웃집에 떡도 돌리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문화가 사라진 것이 내심 아쉽다. 



‘집의 시간들’은 지금은 철거된 둔촌 주공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철거 이전의 이곳은 공동체였다. 녹지가 무성했고, 샛길이 많았으며, 서울 안에 있으며 서울에 없는 곳이었다. 오래된 방에서 태어난 아기는 어느새 청년이 되어 철거를 앞둔 아파트를 마주하기도 한다. 못자국과 오래된 스위치에 세월과 기억이 묻어 있다. 이 아파트는 누군가의 한 세월과 삶을 공유했다. 그러기에 철거된 이후의 땅을 보는 누군가에게는 새소리가 들리고, 거실로 들어오는 햇살이 느껴지며, 가족과의 식사가 기억날 것이다. 


BIG에서 설계한 VIA  57 WEST는 공동주거의 새로운 프로토타입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집 마련’이라는 말이 이번 생에는 와 닿지 않는 오늘. 

집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집은 살아야 하는 곳이다. 

삶에 가장 밀착되어 경험되고, 기억되고, 느껴져야 한다. 

풀어야할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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