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번째 이야기
크렙스와 필자는 동물의 ‘의사소통’ 방법을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의 근육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특징지었다.
이것은 조작의 동의어다.
「확장된 표현형」, 리처드 도킨스
한 달이 좀 넘는 기간 동안 공모전에 참여했습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친구 둘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시작하기 위해 팀을 꾸린 건 저였습니다. 본격적으로 한 동물이 다른 동물들의 근육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 명이 만났습니다. K, E, 그리고 M. 만난 시간이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의 정도와는 별개이겠지만 꽤 오랜 시간을 봐온 사이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을 잘 안다고 자부하여 시작했지만 이 기간 동안 이 둘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았으며, 제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알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팀의 작업 과정에 대한 반추와 필자 본인의 반성의 글입니다.
K는 획이 큰 사람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조형적인 감각이 좋으며, 원한다면 하나에 몰두를 잘하는 친구입니다. E는 굉장히 세심한 편입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작은 스케치를 잘 하는 친구였습니다. 반면 저는 그 사이에서 입만 터는 유형에 속합니다. 스스로 대담하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세심한 듯 보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빈 구석도 많아 이도 저도 아닌 묘한 인간형입니다. 다만 작은 것을 보면서도 큰 그림은 놓치지 않으려는 ‘태세 전환’에 능하다고는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만 잡아준다면 입만 털고 잘 마감을 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꽤 괜찮은 조합이지 않습니까. 대담하지만 세심하며, 밸런스도 좋은. 혼자 북 치고 장구도 쳐봤습니다.
미리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사실 서로의 역할을 생각해 두었습니다. 먼저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K가 큰 흐름을 만들면, 제가 잔가지를 쳐주고, E가 디테일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작년 겨울 재미 삼아 산타클로스 MBTI 검사를 했을 때 ‘루돌프 100마리를 이끄는 산타’였는데, 역시 사람 혹사시키는 데는 재능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K가 만든 안을 보면 항상 뭔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만드는 것들도 그 사람을 닮는다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 혼자서 전체적인 구상을 하고 있었기에 맞는 크기를 잡으려고 K를 회유했습니다. 하나에 몰두를 잘 하는 친구이기에 좋은 결과물이 나왔지만 제가 생각한 일정과는 벗어나 있었습니다 제가 회유에 성공한 것이었을까요. 한편, E는 다른 쪽에서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방향 설정만 된다면 잘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해 이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감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신기한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라 각자 담당할 영역을 구분하고 나중에 합칠 지, 아니면 함께 모든 영역을 다룰 지 작업 방식에 대한 초기의 선택이 중요했습니다. 함께 전체의 흐름을 잡은 뒤에는 분위기 전환 겸 각자 관심 있는 영역에 대한 안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각자 다른 영역에 대한 안을 하나씩 가져온 점이 신기했습니다. 서로 어떤 영역을 구상해오겠다는 말도 없이 서로 다른 부분을 알아서 선택했습니다. 각자의 관심사가 달라 집중하고 싶었던 부분도 달랐습니다. 큰 흐름은 같이 하면서 작은 부분은 모두 다른 것이 팀원 개개인의 모습과도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업 방식을 고민하던 차에 서로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하에 각자의 담당 영역을 설정하고, 다른 이들이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문제는 피드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피드백은 하나의 의견일 뿐 수용하는 방법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피드백을 주는 입장에서는 제3자의 입장에서 진행자가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게 해주고, 받는 입장에서는 건설적인 의견은 수용하되 지나친 비판에는 흔들리지 않고 개인의 선택에 대한 믿음을 갖고 본인의 안을 견고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근데 문제는 제 피드백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는 점입니다. 피드백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 피드백 또한 달리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취향의 문제도 있었지만 공모전이 팀으로서의 작업임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영향력이 너무 크다 싶었을 때부터는 일부러 힘을 빼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군가의 생각을 제 입맛대로 바꾸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안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정도로만 진행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늦었거나 빨랐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한 사람의 입장에서만 바라본, 지극히 주관적인 기억인 듯합니다. K와 E가 보기엔 제가 시간과 작업량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팀의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하다고 느꼈을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상황 판단과 대응만 하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제 스스로의 능력 부재였음을 다시 느꼈습니다.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너지는 존중과 신뢰 속에서 나올 수 있음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한 연구소에서 일할 적의 이사님이 저를 불러 얘기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저 같은 사람은‘organizer’라고 말입니다. 개인이 모든 영역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모든 영역을 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게 협력의 존재 이유이자 필요성입니다. ‘organizer’는 특정 분야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개인의 능력을 포착하고 그 사람의 위치를 정해준 뒤에는 그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출하게 뭔가를 잘 하지 못한 이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이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제 숙제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구성원의 성향 상 그 중에서 각자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알아야 하는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각자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않고, 참견만 많이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다른 이의 근육을 쓰면서 그 근육의 주인을 조금 더 생각하지 못했음에 대해 반성합니다. 앞으로는 더 나은 방법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해준 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젠 충분히 근육을 이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