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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ENA Oct 03. 2020

명절은 모두 함께 하는 날..

여자들이 일하는 날이 아니다.

나라마다 풍습이 다르고, 명절도 다르다. 지내는 방식도 각기 다른 것처럼 우리나라 역시 지역마다 풍습이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르며 제사를 지내는 방식도 다 다르다. 그런데 항상 명절만 되면 지역과 풍습에 상관없이 공통적인 것이 있다. "여자들은 일하는 날"이라고 회자되는 점이다. 

나 역시 손이 귀한 집까지는 아니었지만 6남매 중 장남의 큰딸이다. 아빠 위, 아래로는 3년씩 터울로 고모 한 분이 계시고 아래로도 고모 두 분과, 작은 아버지 두 분이 계신다. 당연히 나의 엄마는 맏며느리이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13년째 매년 두 번의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忌祭祀:고인이 돌아가신 날을 기일 지내는 제사)와 두 번의 명절을 지낸다.  양가 조부모님들께서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합으로 치면 양가 최소 6번에서 8번의 제사를 지내게 되는 셈이다. 

물론 집집마다 가풍이 다르겠지만 우리 집의 경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부터 조금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친가 친척들은 일 년에 한 번 모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편찮기 시작했던 때부터 더 심해졌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아예 친가 친 적들은 왕래가 단절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호주로 가서 결혼을 하고 살고 계시는 막내 고모를 제외하고는 사실 전화 통화도 일 년에 한 번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남보다도 못하게 살고 있는.. 아니 그냥 남 인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데 그것도 뭐  그냥 이렇게 우리 집의 일이다.  하다 보니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둘째 작은 아빠네 식구들은 애초에 우리와는 연을 끊고 살았고,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살고 계시는 막내 작은 집도 명절 그리고 조부모님 기일에도 전화 한 통화가 없다. 물론 고모들 역시 다들 맏며느리라 당신들의 소임을 다 하느라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는지, 성묘를 가는지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의도치 않게 가족의 흑 역사를 풀어놓은 것 같은데 이렇게 각자 자신들만의 삶을 산지가 너무도 오래되어서 별 대수롭지 않다. 물론 우리만 노력했다고 유세를 떠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끼리도 오가는 게 있어야 돌고 도는 게 인지상정. 한쪽에서만 공을 들여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살고 있는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왔는지 민망하다.ㅎㅎ- 아무튼 다행히도 이렇게 단절된 집안에서 장남으로써의 의무를 당연하고 충실하게 묵묵히 하셨던 아빠와 고모들이 음식 일손 도와주기는커녕 '고생한다'라는 전화 한 통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힘든 내색 없이 맏며느리의 소임을 다하는 엄마 덕분에 나는 '명절 고부간의 갈등' '명절 시금치' '명절증후군' '명절 이혼' 등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뉴스에서나 보는 이야기였고, 가끔 주변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들으면 집에 가서 '이번 명절에 OOO네 시댁에서 이랬데~'라고 하며 신기한 것을 들은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는, 남들이 듣기에는 조금 특이하지만 내가 생각할 땐 참 감사한 분위기의 집에서 자라났다.  



이번 명절은 코로나 때문에 공원묘지에 오지 말라는 곳도 많이 있었고, 음복(飮福)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음.)을 하지 말라는 곳도 있었다. 다행히 친 조부모님을 모신 곳에서는 언제든 와도 된다고 하였고, 음복도 제지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를 모신 곳에서는 조문은 가능하나 음복은 불가하다는 원칙을 세웠고, 두 곳 다 마스크 착용은 필수였기에 우리 식대로 진행을 하며 지킬 것은 또 지키며 조문을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왔다. 

물론 명절에 양가 친척들이 다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모여 떠들썩하게 보내는 분위기는 아니고 그렇다고 음식을 많이 해서 허리가 휘는 집도 아닌 것은 사실이다.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명절에 송편도 빚고, 전도 부치고, 만두도 하고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그때에도 우리 집은 여자들만 전을 부치고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작은 아빠들은 밤을 깠고, 만두피를 반죽했고, 아빠와 할아버지는 마당에 잔디를 깎거나 나무를 손질하셨었고, 나와 사촌 언니들은 잔심부름을 했었다. 무거운 것들은 당연히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 당시에도 쓰레기 버리는 일은 너무 당연하게 남자들의 몫이었다. 무려 25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설거지는 남자들의 몫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크게 개의치 않아하셨다. 엄마와 작은 엄마들이 과일을 깎으면 으레 나를 포함한 손녀들이 포크를 들고 다니며 과일을 어른들께 전달했고, 그 당시에도 할머니는 작은 엄마들에게 하루 자고 가라는 얘기는 안 하셨던 것 같다. 다들 아침 일찍부터 모여서 밥을 먹고 치우고 하는 것이 힘들고, 명절이니 친정에도 가라고 다들 보내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나의 명절은 대략 하루 정도 빡세게 양가를 왔다 갔다 하며 밥을 먹고 나면 쉬는 날이었다.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결혼한 친구들의 하소연이 종종 들리고, 친척들이 모였을 때는 명절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했다. - 굳이 여기서 어떤 이야기들을 들었는지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내 인생의 한 컷 중 -


집집마다 가풍이 다 다르고 속 사정(?) 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게 나쁘고, 내가 맞는다고 하는 것의 기준이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분란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한 환경에서도 전혀 그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게끔 소임을 다한 내 부모님께 너무너무 감사하고 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슬슬 '명절 이혼' '코로나로 인해서 오지 말라고 했던 명절이지만 역시나 명절증후군'이라는 단어들을 볼 때마다 항상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요즘은 다들 맞벌이에 다들 바쁜데, 집집마다 가풍은 다 다른데 항상 명절이 되면 "여자들이 피해 보는 날" "여자는 일하는 날"로 회자되는 것이 말이다. 

그래도 이번 코로나는 집에 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들 하는데 조금은 덜 피곤하고 덜 힘들었던 명절이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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