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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Dec 25. 2022

20년의 세월, 한 결 같은 종주로

등산 일기 #384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영하 10도 이하)는 내 두다리를 슬슬 헬스장으로 밀어넣었다. 며칠간 운동은 그저 코어 운동과, 단지내 헬스장에서 쓰레드밀을 부비적부비적 한게 다 일뿐. 이렇게 가다간 밀려오는 지방덩어리를 면치 못할게 자명하다. 도저히 안되겠다. 오늘은 나가자. 추워도 나가자. 나가서 싸우자. 추위와 싸워서 지방을 태우자. 그래 초심 코스로.


20여년 전 부터 시작했던 등산. 그 때 시작했던 곳이 청계산이었다. 옛골 계단 중턱에서 주저앉아 땀을 흘리며 여기가 정상 부근일거야라는 자위를 무기로 하산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 없지만 첫 걸음에 초행길 정상까지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누.


그때 그길로


영하 10도보다 낮은 아침. 마음속에 코스를 예정한다. 옛골 깔딱고개 코스로 오르자. 잠시 워밍업을 마치는 계단 이전 정자에서 방풍복으로 갈아입고 땀흘 흘릴 준비를 한다. 습습후후 호흡을 가누어 천천히 오른다. 아 오늘 처럼 누적 적설량이 한파에 그대로 얼음으로 남은 날엔 아이젠은 필수장비다. 초입부터 끼운다. 아니나 다를까 등산화의 발등 중반까지 눈이 밟힌다.

뽀드득뽀드득. 아이젠의 스파이크 사이로 스며드는 사각 눈들이 내 걸음을 재촉한다.

올해 유난히 국사봉을 많이 오르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은 이수봉에서 바로 석기봉을 넘지 말자. 국사봉에 들르자. 다녀오는데 2km가 더 소요되고, 중턱으로 내려갔다 다시 오르는 험난한 구간이지만 내게 국사봉은 추억이 많은 곳이다. 넘어지기도, 좋아하기도, 보급하기도, 매서운 바람과 싸우기도, 좋아하는 나무를 만지기에도 고마운 코스 아니던가. 국사봉까지 40분만에 이수봉으로 돌아오자는 마음속의 목표를 꼿꼿하게 세워두고 걷는다. 어느덧 눈덥힌 국사봉. 과천 방향이 청명하게 보인다. 20억짜리 아파트들이 봉긋하게 새로 들어선 모습을 본다. 세월은 사람들 저마다 다르게 들여다보기에 야속하다. 누군가에겐 기회의 시간이 누군가에겐 아쉬움의 시간이 될 수도 있으니. 모두에게 즐거운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중간보급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물 외엔 중간 보급식을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나섰던 아침. 되돌아 가기에도 사나운 타이밍에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 흔한 초코파이, 빵, 오이 하나도 챙기지 않고 능선 따라 종주 코스 네 개 주봉 탈 생각은 무슨 자신감일까.


아니 미친거지.


국사봉에서 돌아오는 능선에서 이수봉 항상 그 자리 그곳에 장사하는 그분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다행히 바램은 적중. 구수한 멸치 내음 풍기는 국물이 뽀글뽀글 기포를 내며 끓고 있다. 그리고 다소곳이 하늘향에 서있는 오뎅꼬치들. 하나 집어 바로 입에 문다. 넓직한 국자로 국물도 떠서 종이컵에 넣고는 이 구수한 맛이 어찌나 반가운지 또 고마운 마음. 허기를 겨우 채운다. 오뎅꼬치 두 개로.

    

허기를 겨우 채우고. 다시 석기봉으로 향한다. 시간은 어느덧 해의 중천을 지나 오후로 향한다. 동지를 지나는 시점이라 요즘 오후 중반이면 어눅해진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중간중간 흙도 보이지만 석기봉 부터는 하얀 눈이 더디게 다져진듯 딱딱하다. 한 계단 한 계단 걸어 석기봉 정상 부근.

이 청계산 종주 훈련 A코스 (경기대 후문에서 출발해 양재까지 이르는 26km 종주를 해내려면 자주 청계산 능선을 훈련해둬야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뷰가 등장했다. 이곳에서 셔터를 연신 누르고 돌아서는데 이채로은 복장을 한 팀이 다가온다. 그리고 내게 건네는 말.


메리크리스마스

산타 복장으로 등산을 하는 모습은 20년간 등산 인생 중 처음이었다. 그래. 마음이 따스한 종주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그리움은 이렇게 풀린다. '안녕하세요'라고 항상 먼저 인사하는 종주로에서 이런 이채로운 만남은 더욱 즐겁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우리는 마음이란걸 가진 인간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있을 때 가장 좋아하니까. 마무리 매봉을 지나 다시 옛골 정토사 길로 내려왔다. 하산길엔 폴을 이용해 무릎의 부담을 줄였다. 이젠 그럴 나이다.

오늘도 산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얗고 아름다운 눈세상을 보여준 산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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