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냄새는 행복의 기억
그림책에 푹 빠진 저는 오늘 맘먹고 도서관에 갑니다.
늘 가는 곳인데 왜 마음을 먹고 간다고 하는 걸까요?
그건, 특별히 '어린이 열람실'을 향하는 마음 때문이지요.
아이가 어릴 적엔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한동안 갈 일이 없었네요.
아이들 틈에 편하게 앉아 실컷 그림책을 보다 오는 것이 오늘 나들이의 이유입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네요.
이석구 작가의 '두근두근'입니다.
나무쟁반을 들고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채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빼꼼 쳐다보는 모습이 얼마나 부끄럼을 많이 타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만든 빵들이 표지 가득 부유합니다.
잘 구워진 맛있는 빵이 한가득입니다.
한 장 넘기니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노랗게 펼쳐집니다.
마을에서 뚝 떨어진 숲의 어귀에 집 한 채가 보이네요.
마을과 집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트럭이 한대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구운 빵을 마을로 실어 나른 모양입니다.
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문 앞에 이런 메모가 적힌 간판이 걸려 있네요.
'들어오지 마세요. 두드리지도 마세요.'
사과 상자와 밀가루 포대가 옆에 놓인 문은 꽉 다문 입처럼 좀체 열릴 것 같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밤입니다.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안에 누군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똑똑똑'
두드리지 말라는 메모를 못 본 걸까요?
산책길에 빵 냄새를 맡고 문을 두드린 건 코알라입니다.
부끄러움에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브레드 씨는 금세 따뜻한 우유와 갓 구운 카스텔라를 건네네요.
'아, 달콤하고 폭신해!'
밤마다 혼자 빵을 굽는 브레드 씨네 집에 하나 둘 동물 친구들이 방문을 합니다.
그때마다 브레드 씨는 빵도 구워주고 잼도 만들어 주네요.
밤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빵을 굽는 브레드 씨네 집에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찾아옵니다.
소문이 금세 퍼진 모양입니다.
브레드 씨는 드디어 빵집을 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두근거림을 표현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그림 가득 전해집니다.
'두근두근' 빵집을 읽으며 떠오른 책이 있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단편집에 실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입니다.
제가 카버의 단편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림책 덕분에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게 되었네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토요일 오후, 그녀는 쇼핑센터에 있는 제과점까지 차를 몰고 갔다. 갈피마다 케이크 사진들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바인더를 훑어본 뒤, 그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녀가 고른 케이크에는 하얗게 뿌려놓은 별들 아래 우주선이 설치된 발사대, 그리고 반대쪽으로 빨간색 프로스팅으로 만든 행성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아이의 이름이 '스코티'는..... 굵은 목의 늙은 빵집 주인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92p]
아이의 엄마는 다소 퉁명스러워 보이는 빵집 주인에게 아이의 여덟 번째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고 돌아오지요.
그러나 생일날 아침 스코티는 뺑소니 차에 치게 됩니다. 차에 치었지만 금세 일어나는 아이를 보고 차는 그대로 지나가네요. 학교로 가려던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조금 전 일어난 이야기를 하고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잠이 들었습니다.
겁이 난 엄마는 병원으로 향합니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아이는 도통 잠에서 깨질 않습니다.
의사는 검사 결과 큰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스코티의 엄마 아빠는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곧 깨어날 거라던 아이는 결국 사흘 만에 영영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을까요?
이 단편을 읽으며 세월호 아이들 생각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가 깨지 못하던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스코티의 부모에게 자꾸 이상한 전화가 걸려 옵니다.
빵집 주인은 찾아가지 않은 케이크 때문에 건 전화였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스코티의 부모는 뺑소니 차주인이라 여긴 모양입니다.
아이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처절한 상황입니다.
["스코티는 이제 없고, 우리는 앞으로 그런 삶에 익숙해져야만 해." 119p]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말없이 끊긴 전화기를 바라보던 아이 엄마는 그 전화가 어디서 온 것인지 기억해 냅니다. 망할 놈의 빵집 주인...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로 늦은 밤 부부는 쇼핑센터로 향합니다.
마치 아이의 죽음이 빵집 주인의 탓이라도 되는 양 이글거리는 분노를 안고 말이지요.
누구한테 이 분노의 슬픔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빵집 주인은 밀대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앞치마도 풀어 조리대 위에 던졌다...... "여기 좀 앉아 주시오."....."나는 못된 사람이 아니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126p]
화살같이 쏘아대는 스코티의 엄마를 무뚝뚝한 빵집 주인은 따스하게 받아줍니다.
분노에 찬 부부의 말을 끝까지 침착하게 듣던 빵집 주인은 의자를 두 개 꺼내 그들을 앉히고는 오븐에서 갓 구워진 빵을 꺼내 따뜻한 커피를 내려 그들에게 건넵니다.
따뜻한 빵 집안, 금방 구워진 계피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합니다.
무뚝뚝한 빵집 주인은 외로움과 중년의 삶에 대해, 그리고 날마다 반복되는 그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꺼내 놓지요..
부부는 날이 새도록 그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빵집으로 향했던 발걸음을 더 이상 스코티가 없는 집으로 되돌리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요..
어릴 적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면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시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해가 어스름 저물 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톡톡 도마 위 칼질 소리,
새어 나오는 구수한 음식 냄새,
방 안으로 스며드는 저녁 향기에 마음이 차분해지던 그 기억이 제 행복의 밑천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정성껏 준비하는 음식은 '사랑'입니다.
그림책을 보고, 책을 꺼내 읽고,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벌써 하루가 다 저물어 가네요.
이제 슬슬 앞치마 두르고 부엌으로 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