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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와 그림책

첼로 노래하는 나무

by winter flush

그림책을 펼쳤습니다.

비 오는 날 물기를 품은 저녁 풍경처럼 그림은 번져 보입니다.

의도적으로 피한 시선처럼 뚜렷하게 대상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눈물로 번진 편지처럼 뭉게뭉게 형체를 지워내기도 합니다.

이 그림책의 첫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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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케이스가 열린 사이로 작은 아이가 엎드려 자고 있습니다.

속이 벌건 하드 케이스는 커다란 입을 벌린 상어처럼 무거운 존재로 느껴지지만 세상모르고 잠이 든 아이는 그 안에서 생명을 속삭이네요.

죽음과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연결 고리처럼 느껴지는 첫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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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따라 숲을 걷는 아이.

나무로 둘러싸인 숲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아이와

나무를 키우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나무를 깎아 첼로를 만드는 아버지가 그려집니다.

오랜 시간 나무의 소리를 담아낼 악기를 만드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는 숲이 들려주는 소리와 현이

빚어지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게 되겠지요.


아빠의 손을 잡고 첼리스트 파블로 씨에게 완성된 첼로를 들고 가는 길.

“숲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소리야.”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흐르는 시냇물에 반사되어 반짝입니다.

풍경은 소리가 되어 새어 나옵니다.

수천 번의 날갯짓을 하는 새는 빛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첼로가 건네 준 숲의 소리는 굵게 그어지는 현의 소리로 아이의 가슴에 새겨지고,

그 소리엔 숲의 사계절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붉은 가을의 왁자한 수런거림은 지는 낙엽과 함께 소멸되겠지요.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아이는 자신이 갖게 될 악기를 꿈꾸는 것일까요?

나무에 새겨진 자연의 소리를 아이는 상상합니다.

선율이 흐르듯 숲 한가운데로 음이 쏟아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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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으로 활을 잡고 현을 켜던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어 가슴에 새겨진 숲의 소리를 아이들에게 전합니다. 삭막한 도시에 숲의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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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히데코의 그림책 ‘첼로 노래하는 나무’

그림책을 넘기다 보면 찬란한 빛은 조각조각 흩어져 반짝이고, 빛 사이로 굵은 현의 느린 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계속해서 이어 듣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리가 들리는 그림은 어떻게 그리는 걸까 궁금해졌습니다.

작가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30대 후반에 망막이상으로 수술을 받은 뒤 사물을 명확하게 볼 수 없게 되었다는군요.

좌절할 만한 상황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작가는 자기가 보이는 대로 그리면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나 봅니다.

자기 삶을 살아낼 줄 아는 사람이군요.

보이는 느낌, 그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네요.

그림책을 집어 들고 처음 펼쳤을 때의 첫 느낌.. 명확하지 않은 그 번지는 듯한 인상은 작가의 눈에 보이는 솔직한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스러운 흐름 그대로를 표현한 것이지요.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더 잘 표현하게 된 걸까요?

제겐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빛과 그림과 소리가 어우러져 하루 종일 마음을 반짝입니다.

흐린 날씨에 어울리는 첼로 소리는 또 얼마나 멋지게 울리는지요..

그림 속 아이를 따라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가 봅니다.


그림책 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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