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가둬두지 않겠다
장애라는 감옥에 너의 꿈이 갇히지 않도록
어린 시절 위인전기에서 읽었던 에디슨 이야기를 기억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화일 것이다. '어린 에디슨이 달걀을 품었다'는 그 일화다. 역시 위인은 다르다며 그의 탐구심에 감탄하며 끝났던 위인전기.
최근 <패턴시커>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이 책에서 에디슨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저자는 그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 또한 자폐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고도로 체계화하는 능력과 반면에 떨어졌던 공감능력. 그리고 자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체계화 능력에 대한 놀라움을 이야기해 나갔다.
난 극단적으로 상상해 봤다. 만약에 DH가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 품었다면? 아마 나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호되게 가르쳤을 것이다. 실제로 DH는 종종 달걀을 꺼내 이곳저곳에 세워보고 만져보고 깨진 달걀 껍데기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그러다 걸려 나에게 종종 혼나곤 한다.
DH가 하는 많은 행동과 질문 (그러면 어떻게 돼요?)을 나는 장난으로 치부하고 무의미한 발화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이유는? 나의 아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실제로 에디슨이 자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어떠한 행동이든 지지를 받았을 뿐이고 나는 지지를 못하는 입장이었을 뿐이다. 나 또한 자폐라는 틀 안에서 아이의 가능성을 보지 않고 가둬두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리고- 그렇다면'이라는 체계화 사고 속에서 아이는 계속 자라는 진주일지 모른다. 매몰차게 던지고 있는 것은 세상이 아닌 나 아닌가.
사실 당면하지 않으면 진실을 모르는 일들이 가득하다. 나는 지금의 업과는 상관없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었다. 그 당시 어떤 모임에서 나를 소개해야 할 일이 있어 자소서를 쓴 적이 있었다. 며칠 전 그때 썼던 자소서를 우연히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20대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글. 그 글 속에 나는 '장애는 차별이 아닌 차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옳은 소리다. 요즘 내가 꽂혀있는 신경다양성에 대한 생각과 결을 같이 한다. 그 당시 나는 정말 그것을 이해하고 이러한 말을 썼을까? 물론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별과 차이라는 말은 지금에서야 나의 가슴을 내리친다. 당사자가 되어서도 아이를 가둬두고 나서야 보이는 이 말에 오랜만에 마음이 아렸다. 고작 이 세상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밥벌이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아이의 한계를 규정한 건 나다. DH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군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었다. 너는 군대를 갈 일이 없단다라고. 하지만 내가 틀렸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꿈은 아이돌이며 우주비행사이지 않은가? 그 꿈에 그 누가 한계를 지어주지 않는다. 자폐를 가졌다고 그 꿈이 작아질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