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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Apr 23. 2023

독립선언을 OOO에서 했다고? '태화관(泰和館)'

연회장소, 독립운동의 중요지점이 되다

이번 글의 주제는 바로 '태화관'입니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언급될 만큼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진 첫날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오해하여 3.1 운동의 전개나 의의가 다소 훼손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독립선언의 장소로 쓰인 '태화관'에 대해 적고자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같이 알아보시죠.


'순화궁(順和宮)'에서 '태화관(泰和館)'까지


3.1절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본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고자 하였으나, 혹시나 있을 청년, 학생들의 폭력시위를 우려하여 거사 하루 전날 독립선언의 장소를 태화관이라는 '조선요릿집'으로 변경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태화관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태화관의 1970년대 모습. 이 건물은 1980년에 철거되어 현재의 태화빌딩으로 이어집니다.


본래 이 자리에는 '순화궁(順和宮)'이라는 별궁이 있었다고 합니다. 헌종 시기 그의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가 헌종의 사후 김흥근의 집으로 나와 평생을 살았던 곳인데요, 이때부터 경빈 김씨의 궁호를 따서 순화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 궁은 1907년 경빈 김씨의 사망 이후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의 소유가 됐다가, 1911년 이완용이 직접 이 집을 매입하여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인 1913년, 이완용은 인왕산 아래의 옥인동에 서양식 2층 저택을 지어 집을 옮겼고, 본래 갖고 있는 순화궁을 전세로 내놓습니다. 이때 이 자리에 세입자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명월관'이라는 조선요릿집을 운영하던 '안순환'이었습니다.


안순환의 사진. 고려시대 한반도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들여온 안향의 후손으로, 전선사(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담당하던 부서)의 우두머리인 '장선'의 직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1918년, 안순환은 이곳에 명월관의 분점을 짓고 '명월관 인사동지점'으로 오픈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곳을 흔히 '태화관'으로 불렀던 이유로 지금 우리에게도 '태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오픈한 지 1년이 지난 1919년, 이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요, 독립선언 시간인 오후 2시, 참석자 중 한 명인 손병희는 같은 자리에 있던 최린을 통하여 안순환이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알리도록 시킵니다.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


안순환의 전화를 받은 총독부는 그 즉시 경찰병력 80여 명을 태화관으로 보내 에워싸도록 합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별 동요 없이 만해 한용운의 진행에 따라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일본 경찰에게 순순히 체포됩니다.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자 모인 민족대표들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본래 33인이 왔어야 하나, 4명(길선주, 유영대, 김병조, 정춘수)이 사정상 오지 못하여 29인이 참


왜 요릿집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과거와 지금의 요릿집 활용도 차이


아마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니 왜 독립선언서를 저런 곳에서 읽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요릿집'이라고 하는 곳이 어떤 식으로 활용됐는지만 봐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요릿집은 각종 행사, 비밀활동의 진행을 위한 대관 장소로 널리 쓰였던 곳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개만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925년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결성


김찬은 지난 대정 十四년 四월 十七일(1925년 4월 17일), 시내황금정 중국료리집 아서원(雅叙園)에서 동지十여명과함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야......
- 동아일보 1932년 5월 7일 '조선공산운동의거두 김찬금일예심종결' 중 -


조선공산당 결성이 이뤄진 '아서원'의 모습. 당시 결성 멤버 중 하나로는 남로당의 영수 '이정 박헌영'이 있었습니다.


2. 1926년 식도원에서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회 개최


조션 어연구에뜻이깁흔유지들의 주최인훈민정음 반포뎨팔회갑긔념식(訓民正音頒布第八回甲記念式)은 예뎡과갓치재작사일식도원(食道園)에서사게에연구가 깁흔선배를 비롯하야사회각 방면의인사들이 다수히참석한성황리에열리엿는데......
- 동아일보 1926년 11월 6일 '이하늘과이따우에 거듭퍼진 『한글』의빛 중 -


1926년 식도원에서의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회 모습. 참고로 식도원도 안순환이 1922년에 새로 차린 요릿집입니다.


3. 1936년 사해루에서 배명학교 증축 축하식 거행


三十년의 역사를가지고 만흔인재를 양성한 광히정 배명학교(培明學敎)에서는 금번 학년을 六학년제로 연장하야 내용을 확장하게되엇다. 그부근 주민들은 이를축하하기위하여 지난四일에 사해루에서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하는동시에......
- 동아일보 1936년 7월 11일 '배명교증축 토지를기부' 중 - 



4. 1940년 열빈루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 유작 출판기념회 개최


소년운동과아동문학의 선구자로 일즉이어린이를위하야 만흔활동을 하다가 지금으로부터 十년전에 세상을떠난고 방정환(故方定煥)씨의 유저 "소파전집"(小波全集)이출판된것을 기회로 차상찬(車相讚)씨외 二十八씨의 발기로 그의 유족함께 기념회합(記念會合)을 다음과같이 열기로되엇다한다 시일 22일(토) 오후5시반 장소 시내종로3정목 열빈루 회비 2원(당일지참)
- 동아일보 1940년 6월 22일 '고방소파유저 출판기념회합' -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에는 정말 다양한 행사들이 요릿집을 대관하여 벌어지는 일이 흔했습니다. 지금이야 행사 장소로 쓸 수 있는 대형공간이 여기저기에 많기 때문에 구분을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장소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의 기념식을 하기 위한 장소로 요릿집만큼 적합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죠. 달리 말하면 당시의 요릿집은 요즘 말하는 MICE 산업의 필수요소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대표들도 이토록 거국적인 행사를 진행할 곳으로 요릿집을 선택했던 것이죠.


태화관은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흔히 태화관에 대한 스토리는 여기까지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독립선언이 이뤄진 이후의 태화관은 어떻게 됐을까요?


우선 태화관은 민족대표들의 거사가 이뤄진 이후 한동안 영업이 정지됩니다. 그리고 안순환은 태화관을 버린 채 1922년 남대문에 다시 '식도원'이라는 식당을 열고서 사업을 이어가죠. 그리고 본래 이 부지의 주인인 이완용은 1921년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마이어스'가 사들여 여성과 아동을 위한 '태화여자관'을 설립하는데, 이는 오늘날 태화빌딩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현재 태화빌딩의 모습.

<참고문헌>

'조선공산운동의거두 김찬금일예심종결' , 동아일보, 1932년 5월 7일

'이하늘과이따우에 거듭퍼진 『한글』의빛', 동아일보, 1926년 11월 6일

'배명교증축 토지를기부', 동아일보, 1936년 7월 11일 

'고방소파유저 출판기념회합', 동아일보, 1940년 6월 22일 

주영하, [주영하의 음식 100년](11) 조선요리옥의 탄생, 경향신문, 2011.05.17,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105172125335#c2b

[1919 한겨레] “거사의 날밝았다”…친일파 심장부 태화관에서 독립선포, 한겨레신문, 2019년 3월 1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4122.html?fromMob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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