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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Apr 23. 2023

나말여초 시기의 해적

혼란은 바다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이번 글의 주제는 바로 '나말여초 시기의 해적'입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이 시기는 한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천년의 왕국이라는 신라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신라의 영토인 곳은 이른바 '호족'이라 불리는 수많은 지방세력의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들 간의 수많은 힘겨루기 끝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후삼국시대'가 등장하는데요, 이러한 혼란은 바다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바다를 휘젓던 해적 중 소략하게나마 기록에 남은 자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서남해안을 휘어잡던 해적 '능창(能昌)'


지금도 '누구인가?'와 같은 대사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태조 왕건'이죠. 이 드라마에서 임팩트 넘치는 명대사가 여럿 있는데요, 그중에 하나를 꼽자면 바로 견훤의 이 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죽었어~!? 수달이가 죽었어! 수달이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능창이 죽었다는 장계를 읽고 절규하는 견훤(서인석 분)의 모습.


견훤이 아끼던 장수 중 하나인 '수달'이 궁예에게 죽임을 당해 절규하는 장면에서 나오던 대사인데요, 드라마가 방영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장면을 포함해 드라마에서 배우 서인석 님의 포스가 엄청나다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꽤나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이다 보니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는 대사만 알고 드라마 상의 맥락은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을 텐데요, 이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능창'입니다.

능창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능창은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압해현(壓海縣)' 도적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하는데요, 본래 섬 출신이다 보니 수전(水戰)에 능하여 별명이 '수달(水獺)'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능창을 수달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죠.

그러던 어느 시기(기록에 정확한 연도는 안 나와있지만, 흔히 910년 즈음으로 추정합니다), 능창은 유랑하는 자들을 불러 모아 갈초도(葛草島)라는 섬의 작은 해적 떼와 결탁합니다. 그리고는 서남해로 진격해 오는 왕건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왕건은 이미 능창의 계략을 간파했었기에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합니다.

능창이 이미 내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반드시 섬의 도적들과 더불어 변란을 꾀할 것이다. 도적떼가 비록 적으나 만약 힘을 아우르고 세를 합쳐 앞뒤로 막고 끊는다면 승부를 알 수 없다. 헤엄을 잘 치는 10여 인에게 갑옷을 입고 창을 들게 하여, 가벼운 배에 태워 밤에 갈초도 나룻가에 가서 오가며 일을 계획한 자를 사로잡아 그 계책을 막는 것이 좋겠다.
-고려사 권1, 세가 권제1, 태조 총서 中-


왕건의 부하들은 그의 말대로 작전을 수행했고, 마침내 작은 배 한 척에 타고 있던 능창을 사로잡습니다. 이후 능창은 궁예 앞으로 끌려가는데, 궁예는 이 사실에 크게 기뻐했고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서 능창의 목을 직접 베었다고 합니다.

해적이 모두 너를 받들어 영웅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神筭]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려사 권1, 세가 권제1, 태조 총서 中-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포박된 채로 궁예 앞에 있는 능창(김시원 분)의 모습.


이때 능창이 왜 왕건을 공격하고자 했는지, 왕건은 왜 일개 해적이었던 능창을 궁예 앞에까지 끌고 갔는지 등의 정확한 이유가 기록에 나와있지 않은데요, 실제 서남해안과 맞닿은 지역들이 견훤의 후백제 영토였던 점 등과 함께 고려했던 점 등과 엮어서 생각해 봤을 때 '능창이 사실은 견훤 휘하의 해적이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사략해적? '현춘(賢春)'


다음으로 소개할 인물은 '현춘'이라는 해적입니다. 이 인물을 소개하기에 앞서 알아둘 키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신라구(新羅寇)'라는 해적입니다. 이들은 일본 측 기록에 '신라도적(新羅の入賊, 시라기노 뉴코우)'등의 이름으로 전하는 세력인데, 약 8세기부터 고려 건국 이후인 11세기 중반까지 쓰시마(對馬島), 키타큐슈(北九州) 등의 지역을 습격하던 신라 남부 연안의 유민, 해적 등으로 확인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들은 수도로 향하는 일본의 관선(官船)을 습격하여 배에 싣고 있던 곡식을 탈취하고 승선한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본 조정에서는 현재의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시코쿠(四國)의 도쿠시마(德島), 카가와(香川), 에히메(愛媛), 코치(高知)의 4개현을 포함하여 효고(兵庫) 현까지 해적 토벌령을 내렸을 정도입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현춘 또한 신라구의 하나인데, 894년 대마도를 습격하였다가 일본 관군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후소랴키(扶桑略記)'라는 일본의 역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894년 9월 신라해적 수백 명이 쇠뇌(弩)를 갖춘 45척의 배를 거느리고 대마도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후 도망가는 과정에서 대마도 군수인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가 軍司士卒을 격려하여 이들을 뒤쫓아 220명을 사살합니다. 또 선박 11척, 큰 칼(太刀) 50자루, 사발 창(桙) 1,000개, 궁호(弓胡) 각 110개, 방패 312개가 넘을 정도의 무기를 빼앗고 해적 한 명을 포로로 사로잡는데, 이 해적이 바로 현춘입니다. 그는 사로잡힌 이후 일본 조정에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신라는 근년 흉년으로 말미암아 인민이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창고는 비어 있으며 왕성도 예외가 아니라 왕성은 안전하지 못하여 불안에 쌓여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왕(진성여왕)은 곡식과 면직물을 거두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돛을 달고 왔다.
-후소랴키 권 22, 관평 6년 9월 中-


그러면서 현춘은 대소선 100여 척, 군졸 2,500명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왔으며, 도망간 장군은 여전히 3명이 있는데, 그중의 한 명은 당나라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춘이 증언을 하며 신라 진성여왕의 명으로 왔다고 한 건데, 기록이 소략하다보니 실제로 진성여왕의 명을 받고 해적 활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증언 과정에서 거짓을 말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일 현춘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라가 일종의 사략해적을 부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고려사』

『후소랴키(扶桑略記)』

성해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해적」, 퇴계학논총 32, 퇴계학부산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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