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역모를 꾀하다
이번 글의 주제는 바로 '조선시대의 사이비들'입니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 연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JMS, 아가동산 등의 사이비가 신도들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온 사회가 공분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사이비의 악랄한 모습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부터는 조선시대에 등장한 여러 사이비의 사례를 한 명씩 정리해보려 합니다.
내 말대로 하늘이 움직이고, 내 뜻대로 하늘의 군대를 다룬다! 역모를 꾀한 사이비 '문가학(文可學)'
첫 번째 사례로 소개할 인물은 태종 시기의 사이비인 문가학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과 같은 정사기록과 17세기 사찬(私撰) 지리지인 '운창지(雲窓誌)', '남평 문씨 족보' 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관련 기록을 모아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문가학은 고려말에 진주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고려 말 한반도에 목화를 들여왔다는 문익점의 동생인 문익하의 둘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니까 문익점의 조카 중 한 명인 셈이죠. 젊었을 적 그는 나름의 자질이 있어 형인 문가용(文可容)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는데, 이후 그는 내한(內翰, 예문관의 하급관리) 직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니까 한때는 평범한 관원이었던 건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신중경(神衆經)', '태일산법(太一算法)' 등을 외우고 익힌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기록을 보면 실록의 기록자 또는 문가학 스스로가 이런 것들을 익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학(可學)은 진주(晉州) 사람으로 대강 태일산법(太一算法)을 익혀 스스로 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볕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1월 15일 -
내가 젊어서부터 항상 신중경(神衆經)을 외어 그 도(道)를 얻었는데, 무릇 평생에 원하고 바라는 것은 모두 내 술중(術中)에 있다.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7월 9일-
여기서 신중경이란 것은 '화엄신중경'을 이르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을 외워 그들의 도움을 청하는 경문을 말합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부터 조선 초까지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지며 외우곤 했던 구절인데, 태조실록에도 신중경과 관련한 기사가 나옵니다.
숙위(宿衛)하는 사졸(士卒)에게 명하여 《신중경(神衆經)》의 재앙 없애는 주문(呪文)을 대궐 뜰에서 외우게 하였다.
-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27일 -
그리고 태일산법이란 것은 '태일경(太一經, 태일성(太一星)이 팔방(八方)에 나도는 위치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책)'에 기반한 계산법인데, 지금의 일기예보에 해당하는 것에 대한 계산법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점을 봤을 때, 문가학은 당시 불교나 도교의 경전 중 국가에서도 믿을만하다고 여긴 경전을 토대로 사이비로서의 모습을 갖춰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태일산경이 그러한데, 사실 이는 문가학만이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알 수 있는 게 바로 태종실록 2년의 이런 기록입니다.
태일 산법(太一算法)을 익히는 생도(生徒)에게 서운관(書雲觀, 기상관측이나 날짜, 시간 등을 계산하던 부서)에서 학업을 익히라고 명하였다.
-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2월 12일 -
문가학이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태종 2년 7월인 반면, 태일산법을 익히는 생도를 서운관에 불러들이는 시기는 그보다 다섯 달 앞선 태종 2년 2월이므로, 이미 조정에서도 태일산법을 통한 기후의 변화 등을 계산할 인재는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저 시기보다 과학기술이 월등하게 발전한 지금도 일기예보의 예측이 쉽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문가학이 서운관의 관원들보다 기상예측을 더 잘해서 이름을 날렸던 건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추측을 해봅니다.
아무튼 기록에서 문가학이 맨 처음 등장하는 대목은 태종 2년의 기록입니다. 이보다 앞서 문가학이 광주(廣州)에 있던 시절, 봄에 그곳에 비가 잘 안 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광주목사가 문가학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비가 내리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문가학이 이 요청을 받아들여 비가 오도록 하는 일이 3번이나 연달아 생깁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혹하는 일이 생기는데, 조정에도 그 이름이 전해졌는지 그 해 7월 당시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던 '정이오'라는 사람이 태종에게 문가학을 추천합니다.
정이오: 전하~ 진주에 문가학이란 녀석이 있는데, 걔가 글쎄 술법을 부리면 가뭄인 곳도 비가 온대요. 한번 소개받으시겠습니까?
태종: 그래? 내관 있느냐~? 진주에 가서 문가학인가 뭔가 하는 놈 좀 데려와봐라.
태종: 네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며? 날 위해서 한 번 해보시지?
문가학: 3일만 주시죠. 비가 쏟아지게 해 드리겠습니다.
(3일 뒤)
태종: 야? 비가 안 온다...? 다시 치재(致齋)해볼래?
문가학: 그... 제가 한양에 급하게 오느라 정성이 좀.. 모자라서요, 송림사(松林寺) 가서 다시 하게 해 주시죠?
그러고 나서 문가학은 다음날이 되자 대궐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문가학: 오늘 해시(亥時, 21~23시)부터 비가 내릴 건데, 내일이면 비가 억수로 쏟아질 겁니다.
그리고 그날 해시가 되자... 진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면 진짜로 폭우가 쏟아집니다.
문가학의 예언이 맞아 드는 걸 직접 본 태종은 문가학에게 쌀과 옷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후로 문가학은 서운관의 관원이 되어 비가 오도록 치재를 하는 자리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문가학(文可學)에게 명하여 송림사(松林寺)에서 청재(淸齋)하고, 비를 빌게 하였다.
-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4월 27일 -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악해독(嶽海瀆)·명산대천(名山大川) 및 소격전(昭格殿)에 비를 빌고,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하고, 빈궁(貧窮)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드러난 백골과 시체를 묻어 주고, 또 문가학(文可學)을 시켜 기우(祈雨)하였다.
-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5월 21일 -
이렇게 문가학은 비를 오게 만드는 것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태종 5년이 되면 이름값에 맞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에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는데요, 이 때문에 태종은 정사를 돌보지도 못하고, 날마다 스스로를 반성하기에 바빴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壇)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비가 오도록 빌기도 했는데요, 이런 타이밍에 문가학이 또 한 번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며 나섭니다.
문가학: 전하, 저 안 잊으셨죠? 제가 때 빼고 광내서 또 빌면 무조건 비 옵니다. 저만 믿고 기다리세요!
태종: 오 그래, 네가 있었지!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그렇게 문가학은 하늘에 빌어서 비가 오게 하기는 했는데, 영 시원찮게 내리고 맙니다.
과연 조금 비가 내렸으나, 먼지만 적실 따름이었다.
-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5월 8일 -
이후로 그는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라는 관직을 받고 개성으로 가는데, 실록에는 그가 개성에 가게 된 일에 대하여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그가 보이던 능력이 나타나지 않자 신뢰를 잃은 것이죠.
그리고 문가학이 반역을 도모한 시점 또한 바로 그가 개성에 간 이후부터입니다.
개성에 있을 당시 그는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는 한편, 생원(生員)으로 있던 '김천(金蕆)'이란 사람을 은밀히 불러 이와 같이 말합니다.
이제 불법(佛法)은 쇠잔(衰殘)하고 천문(天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 신중경(神衆經)을 읽어 신(神)이 들면, 귀신[鬼物]을 부릴 수 있고, 천병(天兵)과 신병(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인병(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거사(擧事)할 수 있소.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1월 15일 -
이 말을 들은 김천은 그의 제안에 동조를 하고, 전 봉상시 주부(奉常寺注簿) 임빙(任聘)·생원(生員) 조방휘(趙方輝)·전 부정(副正) 조한생(趙漢生)·전 소윤(少尹) 김양(金亮)까지 모두 한편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들과 반역을 일으키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성사(成事)한 뒤에는 문가학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김천은 좌상(左相)이 되고, 임빙은 우상(右相)이 되고, 조방휘는 이상(二相)이 되고, 조한생은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된다.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2월 15일 -
또한 문가학은 이들 무리를 모두 모아 보은사(報恩寺)라는 절의 솔밭에 모여 의식을 치른 후, 문가학을 임금으로 추대하고 임빙에게 교서(敎書)를 2통 짓게 합니다. 그리고 연철을 구해다가 도장을 만드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인(御印)
의정부인(議政府印)
병조포마인(兵曹鋪馬印)
봉사 인(奉使印)
그리고 문가학이 평양을 기점으로 어떻게 거사를 치를지 계획을 세우는데 그 계획은 또한 이렇습니다.
1. 조한생이 미리 평양에 가서 거사가 시작되면 안에서 응하도록 준비한다
2. 문가학은 거짓 도체찰사(都體察使), 김천은 도진무(都鎭撫)로 사칭하여 평양에 간다
3. 12월 21일에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꾀한다
그렇게 그들은 계획을 마무리 짓고 때를 기다립니다... 만 이게 실제로 진행됐으면 세상에 문가학을 아는 사람이 더 많았을 거고, 그렇지 않다는 건 거사가 진행되지 않았단 거겠죠? 맞습니다. 무리 중 한 명인 임빙 때문인데요, 그는 계획이 정해졌음에도 이를 의심쩍게 여기고 자신의 외삼촌인 조곤(趙昆)을 찾아가 거사를 성공시킬 계책을 따로 묻습니다. 그러나 조곤은 거짓으로 이를 허락하는 척하고 이들의 음모를 조정에 고발합니다.
그렇게 문가학과 무리들은 반역의 혐의로 잡혀가는데요, 기록에 따르면 이들 무리를 국문할 관원으로 이숙번 등의 고위 관료를 임명합니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명해 위관(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이숙번(李叔蕃)·윤저(尹柢), 형조 판서 김희선(金希善), 사헌 집의 최부(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1월 15일 -
그리고 이들에게 어떤 형벌을 내릴지를 논의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았던지 조정에서 어느 범위의 인물까지 벌할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 문가학(文可學)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天兵)과 신병(神兵)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하니,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한 놈의 문가학은 미친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국옥관(鞫獄官)에게 말하였다. "지금 문가학 때문에 무죄(無罪)한 사람이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分辨)함이 옳겠다."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1월 15일 -
그리고 고민을 거듭한 조정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형을 집행하여 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
문가학(文可學)·임빙(任聘)·김양(金亮)·김천(金蕆)·조방휘(趙方輝)·조한생(趙漢生) 등을 저자[市]에서 환형(轘刑)에 처하고, 문가학의 아들 젖먹이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중략) 문가학 등의 처자는 모두 연좌(連坐)되었으나, 임빙의 처자와 형제만은 용서를 받았으니, 조곤이 자수하였기 때문이었다.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2월 15일 -
<참고문헌>
『태조실록』
『태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