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권력에 살고 권력에 죽다
이번 편은 조선시대의 사이비 마지막 편으로서 소위 '요무(妖巫)'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겁니다. 실록에는 승려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하는 무당 또한 벌한 사례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그런 사례를 찾아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왕의 총애를 받고 다니던 무당 광해군 시기의 무당 '복동(福同 또는 卜同)'
이번 글에서 소개할 인물은 광해군 시기에 활동하던 무당인 '복동'입니다. 실록의 내용에서 확인되는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동은 본래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가 되는 인물인 김제남(金悌男) 집안사람의 가노(家奴)였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훗날 그는 '저주'를 잘 거는 이로 기록에 등장합니다.
복동이라는 자는 요사스러운 무당인데, 【본래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갖춘 사람으로, 무당이 되기도 하고 박수가 되기도 하였다.】 저주를 잘 다룬다고 자칭하면서 여염에 드나들며 속임수로 사람을 현혹하였다. 간혹 남에게 흉한 짓을 하도록 시킨 다음 자기가 들추어내고는 다른 사람을 거짓으로 끌어대는 방법을 써서 원한을 갚고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35권, 광해 10년 12월 12일 -
이러한 프로필을 갖고 있는 복동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 10년의 일입니다. 당시 궁궐에서는 왕비인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 병에 걸렸는데, 의원이 이를 '사악한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지금 같으면 '의사가 어떻게 그런 진단을 할 수 있느냐?'라고 따질 것 같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는지 그런 저주를 걸 수 있는 사람을 조사합니다. 그러던 중 사헌부의 지평(持平, 사헌부의 종5품 관원)이었던 '신칙'이 다음과 같은 제보를 받습니다.
어제 한 재상이 신에게 글을 보내왔는데 ‘방금 들으니, 저주를 잘하는 복동(福同)이라는 자가 여염에 출입하는데 종적이 비밀스럽다고 한다. 이들 무리가 내간인(內間人)과 내왕하여 이런 요괴스러운 변고를 만들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35권, 광해 10년 12월 11일 -
이로 인하여 사헌부에서는 복동을 왕비를 병에 걸리게 한 용의자로 지목했고, 그를 비밀리에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복동이 사헌부에 체포된 이후 상황은 되려 복동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형조와 좌우 포도청의 조사 과정에서 복동이 제안을 하나 하는데 바로 '왕비를 저주하는 물건을 찾아내 왕비를 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망한 적 복동이 ‘저주한 물건이 아직 궐내에 있는데 그것을 다 파낼 수 있으며, 내전의 증상도 기도하여 회복시킬 수 있다. 만약 효험이 없으면 나를 죽여도 좋다.’고 말했다 합니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35권, 광해 10년 12월 16일 -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고 복동으로 하여금 물건을 찾아내게 하는데요, 복동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궐내에 왕비를 저주하는 물건을 모두 찾아내어 파내고, 왕비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본 광해군은 되려 복동을 매우 아끼게 되는데, 다음의 기록에서 그가 왕의 신임을 얻은 이후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현궁(梨峴宮, 지금의 종로구 인의동에 지었던 궁)에 기도하는 곳을 설치하고 귀신을 그려 놓았으며, 또 열성위(列聖位)를 설치하고 노부(鹵簿, 임금의 거둥 때 쓰이던 의장)·의장·의복을 극도로 사치스럽게 갖추어 놓았다. 복동은 밤낮으로 가무를 벌여 귀신을 즐겁게 하였으며, 또 국내의 산천에 두루 기도하느라고 수만 금의 비용을 낭비하였다. 복동을 성인방(聖人房)이라고 부르면서 의심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성인방에 내려 보내 점치게 하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상을 내리니, 한 달 남짓 만에 권세가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를 흔들었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35권, 광해 10년 12월 16일 -
또한 광해군은 신하들로부터 복동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조정의 신료들은 여전히 복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기에 여러 차례 복동을 잡아들여 추국 할 것을 주장하지만 광해군은 에둘러 말하며 신료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아뢰기를, "...... 요망한 적(賊) 복동(福同) 등을 금부로 옮겨 국문함으로써 반드시 죄인을 찾아내어 법률대로 정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약청을 파하기 전까지는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36권, 광해 11년 1월 20일 -
이렇게 왕이 대놓고 자기를 지켜줬기 때문일까요?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 연간의 토목 공사와 복동의 활동을 한데 묶어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지의 토목 공사와 복동의 기원(祈願)은 모두가 요망스러운 말로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것이었는데도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가 자신들에게 화가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82권, 광해 14년 10월 5일 -
그리고 복동 스스로는 무슨 이유에선지 보통 사람이라면 함부로 저지르지 않을 짓을 벌이는데요, 광해군일기 14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요사스러운 인물인 복동(福同)은 본시 사내놈으로서 여자의 옷을 입고 궁중에 출입한다고 하는데 어찌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 광해군일기[정초본] 182권, 광해 14년 10월 5일 -
남자인 복동이 여자의 옷을 입고 궁중을 출입한다는 것인데, 이보다 뒤에 편찬된 인조실록을 보면 이에 더하여 복동이 다음의 행위를 저질렀다고 나옵니다.
여복으로 변장하고 궁중을 출입하며 궁인들과 혼숙하면서 음행을 자행하였으므로, 분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7일 -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복동이 여성의 옷을 좋아한 것을 넘어서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요, 이때 광해군은 이 내용을 전달받고도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이러한 고발을 한 동부승지 한효중(韓孝仲)을 승지 자리에서 내쫓을 것을 승정원에 알리고, 승정원이 이로 인하여 광해군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들 하죠? 1622년 벌어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광해군은 왕에서 물러나고, 복동 또한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요, 그의 최후에 대하여 인조실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죄인 복동(福同)이 도망쳤다가 포수 김세룡(金世龍)에게 잡혔는데, 추격당할 때 상처를 입어 죽었다고 포도청이 아뢰었다.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7일 -
여기까지가 제가 준비한 '조선시대의 사이비들'에 관한 글입니다. '나는 신이다'의 방영 이후, 많은 사람들이 사이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에게 빠져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해괴망측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반응에 대하여 '역사'는 단호히 사실로써 이렇게 반박합니다. 사이비는 추악한 본모습을 감춘 채 다가온다고, 사이비는 원래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약한 구석을 파고든다고, 사이비에 놀아나는 것은 그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사이비가 어느 한 시대에만 생겨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죠.
저는 역사의 일부를 재조명하여 이를 알려드리고 싶었기에 3편에 걸쳐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 글이 사이비에 대한 경각심을 더 높이고, 사이비에게 피해 입으신 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길 빌어봅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인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