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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 Apr 23. 2023

조선시대의 사이비들 -2-

사이비, 왕족을 사칭하다 걸리다

저번 글에 이어 이번에도 조선시대의 사이비들에 대한 글입니다. 실록을 보면 '요승(妖僧)'이라 적힌 승려들을 벌한 사례가 여러 건 등장하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이들의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승과 왕족을 사칭한 사이비 '처경(處瓊)' 


이번 글에서 소개할 승려는 '처경'이란 승려입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왕족을 사칭한 죄로 잡혀 처형된 승려인데, 실록에 적힌 그의 일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본명은 '손태철(孫太鐵)'인데, 본래 1652년에 평해군(平海郡,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일부 지역)의 아전이었던 '손도(孫燾)'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12살이었던 1664년에 승려 지응(智膺)을 따라 강원도 원주에 있던 황산 고자암(黃山 高自庵)으로 출가하였고, 16살이었던 1671년 처경이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19살이던 1671년 돌연 스승이었던 지응을 떠나 경기도 일대를 떠돌아다니는데요, 훗날 의금부의 심문 기록을 보면 이때부터 지응은 처경과 연락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실록을 보면 그의 외모는 나름 준수하였으나, 성질은 간교하고 사특하였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의 모습을 보면 이런 설명이 이해가 되시리라 봅니다. 처경은 경기도 안성을 근거 삼아 스스로를 '신승(神僧)'이라 칭하고는 여러 악행 및 기만을 저지르는데요, 그 예를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곡식을 끊었다'라고 해놓고 밤에 바위굴에 들어가 남몰래 떡과 고기를 먹음

젊은 여승들에게 불경을 가르친다고 속이고서 간음을 행함

작은 옥으로 만들어진 불상을 들고 다니며 '무릇 빌어서 구(求)하는 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며 사람들을 현혹함


그러나 사람들 눈에 처경은 '곡기를 끊고 경문을 잘 풀이해 주는 승려'였기에 '생불(生佛)'이라 일컬었고, 궁의 나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가 불공의례를 의뢰하기 위해 그가 있는 사찰을 왕래하는데요, 그를 불신하는 자가 없는 이유로 나인들 중에 간혹 그와 사통(私通)하는 이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예 그를 사승(師僧)으로 모셔 계를 받고 스승-제자 사이로 지내는 여성신도까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특히 처경이 이러한 유명세를 얻는 데에는 그의 나이 든 여제자인 묘향(妙香)이란 여승이 한몫했습니다. 그녀는 본래 한양에서 사대부 집의 여종으로 있다가 승려가 됐는데, 간혹 처경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며 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앞모습은 생불 같고 뒷모습은 왕자 같다

이렇다 보니 처경은 이후 죽산, 양지(陽智,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일대), 광주 등을 오가며 그의 명망을 더욱 쌓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1676년, 묘향(妙香)은 처경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소현 세자의 유복자가 혹은 물에 던져졌다고도 하고, 혹은 생존해 있다고도 말하는데, 이제 스승님의 얼굴이 매우 청수하여 왕자(王子)·군(君)의 얼굴 모습과 비슷하니, 혹시 그렇지 않습니까?
-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11월 1일 -

처경은 묘향이 한 말에 그럴싸하다고 느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의 사촌인 복창군(福昌君) 집안사람 중 자신의 사찰로 공불을 오는 이가 생겨 그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듣습니다. 또한 마침 그는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일반 백성들이 속아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기고만장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나라를 속일 마음으로 왜능화지(倭菱花紙)라는 종이에 한글로 거짓 글을 적는데, '소현 유복자, 을유 4월 초 9일생'이라 적고 바로 아래에 소현세자빈을 뜻하는 '강빈(姜嬪)'이란 글자를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許積)의 집을 찾아가 울면서 그 종이를 보여주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곧 강빈의 수적(手迹, 손수 쓴 글씨나 그림)입니다. 매양 외구(畏懼, 무서워하고 두려워함)하는 생각을 품고 감히 내어놓지 못하였는데, 지금 성대(聖代)를 만나서 감히 와서 뵙니다.
-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11월 1일 -


그러나 당시 허적은 병으로 쉬고 있던지라 좌의정이었던 권대운(權大運)이 대신 숙종을 만나 이 편지를 전하는데, 권대운은 다음을 이유로 이 편지가 소현세자빈의 친서가 아니라고 의심합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날은 을유년 4월 26일인데, 이 글에는 을유년 4월 9일생인 자녀를 유복자라 하니 시기가 안 맞다

강빈이라는 칭호는 강빈이 살아있을 적에는 쓰지 않던 말인데, 이 글에는 스스로를 강빈이라 칭하고 있다

글씨체가 일반 백성의 것인 데다 음을 따라 적느라 오탈자가 많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이 글이 거짓된 글이란 것을 눈치채고 11월 4일 이에 대한 추국을 시작하는데, 워낙 심각한 사안이라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의금부가 아닌 훈련도감의 북영(北營)에서 추국을 진행합니다.


당시 1차 심문 때는 처경과 묘향, 묘향과 함께 처경을 키웠다는 김계종 부부, 처경 일행의 숙박을 알선한 한천경, 처경을 따르던 거사 김선명, 박인의, 김자원이 순차적으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차 심문하는 과정에서 처경과 묘향은 서로 상반된 진술을 하는데, 내용을 보면 대략 이러합니다.


처경: 저는 진짜 소현세자의 유복자인데요? 제가 응애일 때 저를 담으려 했던 궤를 물에 던졌다가 다시 빼냈는데, 묘향이 걔가 궁인 정 씨한테 저를 넘겨받고 10년 지나서 까까머리 만든 거라니깐요!


묘향: 처경이 걔는 원래 땡중이었는데요? 저는 걔가 신이하다는 말에 속아서 스승으로 섬겼던 거고요, 묘향이란 이름부터가 걔가 지어준 거예요.


서로 간에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조정에서는 이들을 데리고 대질심문을 했고 그 결과 처경이 점점 설득력을 잃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와중에도 처경은 끝까지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였던 유혁연(柳赫然)이 포도청의 군관들에게 처경의 바랑(승려들이 메고 다니는 배낭)을 뒤지게 하는데요, 여기서 처경이 친척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확인되면서 그의 원래 신원이 밝혀지고, 더불어 허적에게 건넸던 거짓 문서의 초본(草本)이 여러 장 밝혀지면서 처경이 거짓 행각이 발각됩니다.


결국 처경은 죄를 실토하고, 조정에서는 처경의 친척을 비롯해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자들을 모조리 잡아와서 그의 원래 신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그의 부모 또한 잡아들이고자 하나,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아직 생존해 있던 그의 외삼촌 손윤후(孫胤後)와 스승 지응을 잡아다가 처경 앞으로 끌고 옵니다. 이때 처경은 그들과 대면하자 눈을 감고 보질 않았다가 강제로 눈을 뜨게 만들자 '과연 스승이요, 과연 외숙(外叔)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가 밝혀진 이후인 11월 16일, 처경은 용산 당고개에서 처형됩니다.


용산에 있는 당고개 순교성지.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죄인의 처형을 집행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 또한 처경과 관계된 사람들이 여럿 있던지라 모두 형벌을 받는데요, 처경과 함께 사기극을 꾸민 묘향은 고문받던 도중 사망하고, 5명의 연루자가 유배형을 받았으며, 양지 현감의 자제로서 처경이 양지에서 접촉한 적이 있는 정연주, 정윤주 형제는 정상참작하여 수속(收贖, 죄인이 죄를 면하기 위해 내는 돈을 받음)을 하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

최종성, 「무당에게 제사 받은 생불 -요승처경추안(妖僧處瓊推案)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40, 한국역사민속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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