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다시 쓰는 정신의 구조 - 5
서구에서는 물질과 정신이 조금도 섞일 수 없는 실체라는 생각, 그러니까 물질은 1%의 정신 요소도 포함하지 않고, 정신은 1%의 물질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몇백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데카르트라는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시작된 구상이 몇백 년간 이어져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관념은 이렇듯 힘이 세다. 개인의 관념은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인류의 믿음은 문명을 규정한다. 애써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섞일 수 없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 동아시아에서는 애초에 기(氣)라 불린, 일종의 미세물질로 몸과 마음이 이루어져 있다고 여겨서 몸과 마음을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체를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복합체로 본 서양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생명이 정(精), 기(氣), 신(神)이라는 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정기신은 각기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한 가지 실재가 이루어내는 다른 양상에 불과하다.
비유컨대, 기(氣)를 수증기라고 해보자. 그러면 온도가 낮아졌을 때 수증기는 저절로 액체가 된다. 그리고 물을 받아 놓으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저절로 플랑크톤이 생기듯이, 정(精)이 고이고 성숙하면 그에 따라 세포가 생기고 자라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 몸은 그렇게 이루어진 일종의 존재 생태계다. 동아시아에서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라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
존재를 이런 식으로 규정하면 몸과 마음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호수에 바람이 분다면, 당연히 물도 흔들리고 공기도 흔들릴 것이다. 물의 흔들림은 정(精)에 영향을 주어 몸으로 감각될 것이고, 수증기의 흔들림은 기(氣)로 이루어진 심체를 흔들어 마음으로 감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나’, 다시 말해 정과 기가 응집되도록 했던 근원적 존재장으로서의 신(神)은 이 모든 변화를 일으키고 느끼는 주체로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정신(精神)이라는 말도 실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정신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은 이 정신 구조에서 발현되는 기능을 가리킨다. 그래서 마음은 정신보다 훨씬 동적이고 다양한 개념을 품는다.
서구에서 정신과 물질을 이질적인 두 항으로 본 것과 달리, 우리는 그것이 중첩되어 존재하는 한 가지 질료의 다른 양상이라 여겼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매우 달랐다.
흔히 서구 문명은 물질문명, 동양 문명은 정신문명이라 불린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서는 물질계보다 정신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정신에 관한 한, 서구 못지않은 심도 깊은 탐구의 전통을 이어왔다. 일례로 2,500년 전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제내경』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물질계를 움직이는 것을 '마음心'이라 하고, 마음이 품은 것을 '생각意'이라 하며, 생각을 지속시키는 것을 '의지志'라 합니다. 의지를 변화시키는 판단을 '사고思'라 하고, 사고를 통해 미래를 헤아리는 능력을 '사려慮'라 하며, 사려를 바탕으로 상황을 처리하는 역량을 지혜智라 합니다." - 『황제내경』 영추 '본신편'(번역은 저자)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신현상을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그 어휘들이 지금 우리가 쓰는 다양한 정신적 어휘의 기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구적 세계관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지난 백 년가량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다운 생각 대신 서구식 세계관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왔다. 그리고 급기야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를 겪으면서도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다른 방식이 있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한 대안이 있었다. 특히 정신의 이해에 관한 한, 서구 철학자들도 무시 못할 깊이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간 우리는 '기(氣)'에 바탕한 세계관을 매우 미개하다고 여겨 폄하해 왔다. 서구는 이미 19세기부터 동양사상을 탐구해 온 데 반해, 유독 우리만은 우리 철학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서양철학적 개념으로 덧칠해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철학 체계 위에 서양학문이 발견한 분석적 개념을 더하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라는, 지금까지 인류가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면 어떤 해법을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우리는 정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우리가 너무 늦기 전에 그 답을 향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쩌면 현대 과학과 고대의 정신적 전통들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과업이 우리 시대의 지성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체적인 생존은 물론 미래 세대들을 위해, 물리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바람직한 환경을 만드는 일이 그러한 통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Ravi Ravindra, 『Science and Spirit』
※ 짧은 요약
우리는 몸과 마음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이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우리 사상은 서구철학의 한계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문명의 난제들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 인용자료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마음과 철학_서양편 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