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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일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4장. 정신의 구조 - 5

by 어진 식 관점


지금까지 몇 편의 글로, 마음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고 그를 설명할 새로운 방식도 가능함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우리에게는 육체 뿐 아니라 '의식'이라는 정신 기관이 별도로 존재하고, 그 의식이 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몸과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의식'이 무엇인지 알려면, 시야를 넓혀 존재 구조 전체를 조망해 보아야 한다. 오늘은 먼저 '나'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인간, 중첩된 존재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라 여기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인간은 육체 뿐 아니라 영靈 또는 신神이라 불린 또 다른 '나'가 중첩되어 존재하는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더 세밀한 구조도 존재하지만, 크게 보면 '육체와 정신', 동아시아에서는 '정精과 신神'이라 부른 두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구가 물질 차원 뿐 아니라 아원자 차원의 자기장과 중첩되어 있는 것과도 같다.


지구 자기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구가 존재하기 위한 모든 물리적‧생물학적 현상의 토대가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 차원도 우리 존재의 배후에서 '나'가 존재하기 위한 토대로 작용한다. 그러니 알고 보면, 영도 비물질이 아니라, 자기장과 같은 일종의 존재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영 또한 물리적으로 실재한다.


그간 우리가 각종 신비 현상에 대해 숱하게 오해해 온 것은 그것을 어디 멀리, 초월적인 곳에 존재하는 비물질적 현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차원은 지금도 꿈을 꾸거나 상상할 때 만날 수 있는, 지금 이 곳, 내가 숨 쉬는 공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좌뇌가 손상되었던 테일러 박사나 수술 중 의식이 돌아온 환자들이 경험했듯이, 뇌가 작동을 중지하는 순간, 바로 우리 의식 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영靈적 존재장이 실재하고, 그것이 내 존재의 근본 토대라면 '나' 또한 이 존재장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구 자기장은 지구를 정의하는 경계가 된다. 지구 자기장은 우주선과 태양풍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기장이 사라지면 당장 지구 위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자체도 와해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나'는 이 영적 존재장이고, 이 존재장이 사라지면 '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영’이야말로 종교에서 이야기해 왔듯이 ‘참나’라 할 만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일상에서 영(靈)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영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을 위해 기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하여 화제가 되었던 솔크 연구소를 생각해 보자.


루이스 칸의 대표 건축물인 솔크 연구소 전경


솔크연구소는 다른 연구소보다 유난히 층고가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공간이 창의력에 미치는 영향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육체만을 생각해서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영 차원까지를 포함하면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 존재의 가장 바깥층이 창의력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라서, 이 영역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면 창의력도 향상된다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영도 어디 먼 곳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곳에서 나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다.


현재 서구의 학자들은 '마음'까지를 포함한 '나'를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떤 이는 연필이 우리의 인지에 영향을 미치니 연필까지를 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의식이 몸을 벗어나면 곧바로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론도 '나'가 존재한다는,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적인 느낌을 마음에 와닿게 설명해주지 못한다(나는 서양 학문이 현실과 경험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주 안에서 지구가 고유한 존재 영역을 차지하고 있듯이, 고유한 '나의 경계'는 존재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우리의 정신 구조가 몇 층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가장 바깥층에 해당하는 8번째 층(아뢰아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가 존재함을 헤아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태양이 나에게 영향을 준다고, 태양이 곧 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태양빛이 나의 존재장을 흔들 때, 비로소 그 세계와 나는 만난다. 이렇게 보면, 차라리 몇천 년 전에 등장한 유식불교의 설명이, 우리의 경험을 훨씬 현실에 가깝게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도 영(靈, 아뢰아식)이 실재하는 물리적 현상임을 설명하지 못해서, 그리고 그것이 다층적으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지 못해서 아직도 '무아(無我) 대 유아(有我)'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나가 어디에도 없다면, 무엇을 토대로 카르마(업業)가 유전하고 윤회가 이루어지겠는가. 불교계도 이런 면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론에 덮여 필요 없는 힘을 소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뇌가 내 모든 경험의 저장소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만약 기억이 탄생의 순간에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천부적 재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4∼5살 아이가 피아노를 직업 연주자 수준으로 연주해 내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혹자는 DNA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침팬지는 99.4% 동일한 유전자 염기서열을 갖고 있다. 쥐와 인간도 유전자의 80%가 똑같다.’ 0.6%의 DNA 차이만으로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나아가 개인의 재능이나 기질 차이까지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DNA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또 있다. 바로 인류의 역사다. 인류가 뼈 조각에 모양을 새기기까지는 2백만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최초의 컴퓨터라 할 수 있는 계산기가 설계된 후 지금 같은 정보 사회를 이루는 데는 160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그 사이 인류의 생물학적 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현상, 200만 년이나 제자리 걸음이던 인류의 지성이 200년 만에 갑자기 도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생물학적 진화만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의문도 '영'을 존재 구조에 포함시켜 살펴보면 풀린다. 우리가 영혼에 다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너무 많다. 우리가 종교와 철학, 과학에서 이루어 온 발견을 모두 꺼내어 새롭게 조립해 보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진실에서 너무 멀리 와 있다.



※ 짧은 요약

인간 존재의 근원적 토대는 영혼이고, 그것이 '나'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다.


※ 인용 자료

스티븐 미슨, 『마음의 역사』, 영림카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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