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움
아침마다 일어나기가 힘들고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어깨.
이번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잠만 자야지. 푹 쉬어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보낸 주말.
어째서인지 월요일 아침, 출근길 생기라곤 없고 오히려 더 좀비 같은 스스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정말 이보다 더 푹 쉴 수가 없는데. 왜 더 피곤해진걸까요.
그러다 어김없이 누워서 리모컨을 돌리다 '온앤오프'라는 방송에서 마마무의 솔라씨가 대형 특수 면허에 도전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직업과도 전혀 상관없고 누가 시키는 일도 아니고 영리를 위한 일도 아닌 일. 그런 일을 솔라씨는 너무 즐겁고 행복하게 하고 있더라구요.
그 이전 방송에서는 신화의 김동완 씨가 양봉을 하는 장면도 나왔었는데요.
벌에 쏘여가면서 벌들을 돌보고 분봉을 하려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연신 싱글벙글 웃고 계시더라구요.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며 '쉬고'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능동적으로 하며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드디어 저는
'아, 나는 제대로 쉬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굳이 마흔이 넘어서 발레를 배웁니까?”
“왜 로스팅한 원두를 사면 되는데 시간을 들여가며 생두를 볶습니까?”
“왜 더 예쁜 옷을 살 수 있는데 일일이 옷을 만들어 입습니까?”
“왜 일이 끝나고 피곤할 텐데 집에 가지 않고 색소폰을 연주합니까?”
“왜 이 추운 겨울에 칼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탑니까?”
“왜 전공자도 아닌데 잠자는 시간을 아껴 철학책을 봅니까?”
“왜 편안한 아파트에 살지 굳은살 박이도록 땅을 파고 화초와 야채를 가꿉니까?”
“그 야생화가 뭐라고 그 험한 오지까지 가서 사진을 찍습니까?”
“왜 주말에 쉬지 않고 유기 동물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합니까?”
사람들의 대답은 간명했다.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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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8p
물론 우리에게는 휴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충분한 잠을 자는 시간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잠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낸다면??
해보신 분들은 아실텐데요.
일정 시간의 저런 비능동적인 휴식은 도움이 되지만 일 외의 시간이 모두 저런 비능동적인 휴식으로 채워졌을 때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 그리고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는 걸. 그런데 한 번도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가 지난 주말에 읽은, 정신과전문의 문요한 박사의 책 '오티움'에서 이에 응하는 답을 찾았습니다.
옛날에는 단지 휴식으로써의 여가가 중요했다. 몸으로 힘든 일을 하고 난 뒤에 편히 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피로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육체적 피로라기보다는 정신적 피로다. 일의 자율성도 없이 시키는 일을 하고, 끊임없이 감정을 누르고 표정을 관리하며, 모든 활동이 수치로 평가되고,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스트레스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신적 에너지를 크게 소비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오티움은 ‘무위無爲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걸 말한다. 즉, 낮은 단계의 무위는 억지로 무언가를 안 하는 것이지만 높은 단계의 무위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을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채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억지로 애를 쓰지 않는 것,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활동은 우리를 짓누르는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늘 따라다니는 보상이나 결과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현대인의 여가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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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54p
제가 이렇게 여가 시간과 취미 활동, 쉼 등에 대해서 한층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사실 코로나로 비대면, 재택근무, 유연근무 등이 갑자기 도입되면서부터인데요. 시간 활용이 오히려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고 오히려 컨디션이 들쑥날쑥해지고 피곤함을 더 느끼게 되더라구요.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새로운 마케팅 아이디어, 카피 한 줄 쓰는 건 퇴근 후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생각하는데 정작 내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답이 없는 인생이라니요. 인생 백세라며 먹고 살 궁리는 점심시간에도 하면서 내가 에너지를 얻고 행복을 느끼는 제대로 된 취미 하나 없다니 '주객전도'아닌가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싫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정년퇴직 이후 한동안 활기를 잃어버린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다. 이를 보며 많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해!” “나이가 들수록 일이 있어야 해!” 일견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퇴직 후 무기력의 진짜 원인은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 자유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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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31p
그런 경험 다들 있으시죠.
누가 시킨 일, 억지로 하는 일은 너무 하기 싫은데 시키지도 않은 일,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은 왜 이렇게 시간 가는줄 모르고 하는지.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가 않고 재밌기만 하고. 알고보면 그냥 단순히 현실도피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이 다 휴식과 에너지를 채우기 위한 일종의 '오티움'이었나봅니다.
우리가 월급을 받고 하는 '일'은 보상이나 결과물과 바로 연결됩니다. '보상이나 결과물'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는 이 '보상'이나 '결과물' 다른 사람의 '인정'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기쁨을 주는 '활동'이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닐까요.
즉, 그들이 능동적으로 여가 활동을 하는 이유는 보상이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활동 자체가 주는 기쁨’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한 동기에 의해 움직일 때 우리는 외부의 보상이나 위협에 쉽사리 농락당하지 않고 깊은 위로와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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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8p
참고로 오티움의 특성은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뭔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없었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나 스스로를 위해서 꾸준히 취미 활동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했을 때 즐겁고 행복한 일을요.
〈오티움의 특성〉
1. 여가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가 기쁨을 준다.
2. 여가 활동을 즐기나 그것이 인생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3. 여가 활동으로 지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어 일상에 활기를 준다.
4. 자신의 기질이나 취향에 잘 맞는 활동이다.
5. 활동 중에 종종 정신적 이완에 이르거나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진다.
6.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참여한다.
7.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한 활동(예: 테니스나 탱고 등)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적 활동에 기반을 둔다.
8. 활동을 그만둘 때 사람에 따라서는 가벼운 금단 증상이 있을 수 있지만, 서서히 나타나고 일시적이다.
9. 그 활동으로 인해 나쁜 생활 습관을 줄이거나 중단한다.
10. 정신적으로 기민하고 자신감이 증가하며, 자부심이 생겨난다.
11. 그 활동을 통해 삶의 불행이나 고통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12. 어쩌다 한 번 하는 활동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하는 활동이다.
13. 난이도와 배움이 있어 오티움 활동에 따른 성장의 단계가 있다.
14. 오티움은 깊이가 있기에 쉽게 질리지 않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다. 오티움이라고 하려면 최소 1년 이상은 그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15. 일, 관계, 여가의 역동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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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59p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법을 아는 것이다.
-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