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를 빛내 Apr 15. 2021

뉴욕 패션 잡지사에서의 1년 <2>, 그리고 지금.

가끔, 예스맨도 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요즘 일을 하다가 잠시 숨을 돌릴 때 클럽 하우스에 접속한다. 

한국에 있는 친한 친구들과 한 방에서 모여 소식과 안부를 전하거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반말(여기는 수평어라고 부른다)로 자기소개를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셀러브리티나 아티스트가 방을 열면 그곳에 들어가 라디오 팟캐스트처럼 귀 기울여 시청하기도 하는, 꽤 쏠쏠한 재미가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코로나로 인해 하루 종일 집 밖을 나서지 않는 요즘, 제일 부담 없이 소통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그중 내가 즐겨 찾는 방은 아무런 제목도 없고 주제도 없이 그저 수다를 떨기 위해 모인 미국에 사는 직장인들이 모인 방인데 다들 클럽하우스를 켜놓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이다. 


"아, 잠깐. 콜 들어왔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베이스캠프에서 수다를 떨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현생'의 소환에 응답하러 떠나는 그들은, RPG 게임 세계 속 용사와도 같다. 


이 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느끼는 점은, 세상에는 참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그들은 매일매일 일분일초,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점이다. 


예전이지만,  회사와 학교의 개념이 비슷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방학 대신 숨 돌릴 수 있는 짧은 휴가가, 교수님 대신에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의 베테랑 상사가 있고, 그리고 매일매일 일 적으로든, 혹은 사회생활에서 얻는 교훈이 있는 곳. 회사. 


나의 첫 회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입성하게 된 더 큰 학교 같았다. 첫 6개월은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적응하고 주변 동료들과 친해지느라 훅 지나갔다. 새 학기가 되어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이 삼삼오오 친해지듯이. 이따금씩 보스가 내게 주는 프로젝트들은 수행평가나 시험처럼 나의 업무 능력을 시험하는 척도가 되었고, 해마다 있는 업무평가는 나의 한 해를 평가하는 성적표였다. 다만 회사와 학교의 차이점은 나에게 월급이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 


첫 직장이다 보니 부족한 점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았다. 실수도 하고 덤벙대기도 했다. 

모르는 것 투성이이다 보니 난 하루에도 백번씩 보스 C를 귀찮게 굴며 질문세례를 던졌던 것 같다. 이 일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정말 감사하게도 C는 늘 성심성의껏 나의 질문에 대답해주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주는 멋진 분이었다. 나중에 커서 이런 보스가 되어야지,라고 결심할 만큼 귀감의 대상이었다. 첫 직장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님 정말 그런 사람이 없었던 걸까. 어느 회사를 가도 난 그렇게 인내심 많고 일처리가 똑 부러지며, 자신이 아는 노하우를 다 전달해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회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느낀 바인데, 특히 자신이 사회 초년생이라면 더더욱이 자신이 파놓은 의욕과다의 늪에 빠지기 쉽다. 

아직 경험이 미숙하고 자신의 역량을 백 퍼센트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간혹 너무 많이 주어지는 업무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스트레스를 받거나 병을 얻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첫 직장을 다니게 된 지 8개월이 된 시점이었다. 다른 부서의 한 팀원이 데드라인이 임박한 프로젝트를 까먹고 있다가, 프로젝트의 진행 정도를 묻는 클라이언트의 물음에 부랴부랴 우리에게 달려와 광고 디자인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다른 업무로 정신없는 와중에 받은 일이라 거절하기가 어려워 야근을 할 생각이었다. 

늦게까지 내 자리에 불이 꺼지지 않자 C가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 막판에 일이 들어와서요. 내일까지 제출해달라고 해서 이것만 하고 퇴근하려고요." 

그 얘기에 보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한 답변이 아직까지도 인상적이었다. 

"You don't have to clean up other people's mess. You should've said no." 

(다른 사람이 싸놓은 똥을 네가 치울 필요는 없어. 거절했었어야지.) 


그때 처음 알았다. 나도 거절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알아도 상대는 나보다 훨씬 연차가 많은 사람인데 내가 과연 쉽사리 No라고 얘기할 수 있었을까. 

그 날, C는 "Watch and Learn (보고 배워라)"이라고 말하며, 직접 그 부서의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드라인이 임박해서 우리에게 일을 부탁하면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놓기 어렵다며, 클라이언트에게 양해를 구해 마감일을 늦추자고 제안했고, 다행히 우리는 연기된 마감일에 광고를 발행할 수 있었다. 

절대 남용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한 방패 카드와 같은 말. No. 


첫 직장인 패션잡지회사를 떠나 두 번째로 들어온 이 회사에서 나는 보통 3명의 팀원이 팀을 이루어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디자이너인 나, 프로젝트의 타임라인을 조정하고 업무 분담을 하며 회의를 중재하는 프로듀서, 일감을 물어오고 클라이언트와의 연락책을 담당하는 어카운트 매니저, 이렇게 3명. 어떤 팀원과 프로젝트를 같이하느냐에 따라 그 일은 서로의 기싸움이 팽팽한 줄다리기 시합이 될 때가 있고, 돛에 바람이 실린 것처럼 순조로운 순항이 될 때도 있다. 나의 든든한 아군인 프로듀서 M 덕분에 나는 최근에 들어서도 비슷한 No 카드를 쓰는 법을 체득하는 중이다. 이젠 서당개 3년이라고 짬밥과 연륜이 묻어나는 방법으로 거절을 하고 있지만. 


매일 아침 온라인 메신저에 접속을 하면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 회사 직원들은 모두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M과 나는 오늘 하루 동안 할 업무와 프로젝트에 대해 상의한다. 우리는 프로젝트 별로 마감일과 요청 사항을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 M은 나의 타임라인과 현재 담당하고 있는 업무를 파악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너무나 많은 일이 들어올 경우, 우리는 프리랜서를 고용하거나 다른 지사 에이전시에 일을 부탁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스케줄을 조정한다. 물론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회사의 디자이너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해 하나하나 일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법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른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시간, 그리고 역량을 파악해서 팀의 프로듀서와 상의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가 오버타임으로 일을 한다고 해서 회사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며, 설령 안다면 그만큼 회사에서 내게 합당한 보수를 줄 것은 절대 억지가 아니다. 회사와 학교의 차이점은 또 여기서 드러난다. 난 노동력을 지급하는 만큼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고 있다는 것. 아직도 세상 수많은 곳에서 No 카드를 쓰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직장인들이 많다.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더욱 그런 현상은 심하다. 거절은 자칫 내가 자격미달이라고 보이기 쉬워서? 회사는 얼마든지 나를 대신할 인력을 뽑을 수 있다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원인은 얼마든지 많다. 내가 거절을 하지 못하고 회사가 계속해서 나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양측에 서로 해가 될 뿐이다. 만약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회사라면 불필요한 마음고생을 하지 말고 이직이나 퇴사를 고려하는 것이 건강한 선택이라는 것을. 요즘 느낀 점 이쯤에서 마무리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