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 그 남자가 내 목숨을 구하다니
질문을 활용한 글쓰기 (1)
오늘부터는 지난 글에서 남겼던 질문을 활용해, 초단편을 써보고자 한다. 글이 좋았다면 라이킷을, 읽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로 보내주시라. 자, 그럼 개봉박두!
어느새 부터인가 선영은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여기저기 돋아난 개나리와 흙내음으로 보아 봄임에 틀림이 없었는데, 그 꿈에서는 유독 봄비치고는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선영은 강풍과 비가 몰아치는 날씨를 무릅쓰고 다리를 건너고자 하는 참이었다. 그곳에서 항상 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했다. 특히, 눈웃음 주름살과 아래로 쳐진 입술은 그리운 옛 사람을 생각나게 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인상의 얼굴이었으나 그런 얼굴을 똑 닮은 사람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꿈 속에 나온 지 약 한달 쯤 지났을 무렵일까. 그는 멀리서부터 다리를 건너려던 선영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를 바라만 보던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변화는 가히 놀라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공포감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한 간절함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뒤섞여 있었다.
꿈 속에서 남자는 아이가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하루 밤, 하루 밤에 걸쳐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남자의 행동에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관절이 꺾이지 않고 걷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분명히 이상한 남자의 행동이었지만, 선영은 그 남자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 남자는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겨우 한 글자를 뱉어 냈는데, 그것은 “다”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작은 변화였지만, 꿈속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는 선영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 한 달이 지나자, 그는 이번에는 "다리"라고 말했다. 선영은 남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리... 무슨 뜻이지?"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후 혼란스러웠다. 꿈속 남자의 행동과 표정, 그리고 그의 말을 분석하려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다리와 관련된 무언가를 경고하려 한다는 느낌만 강하게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20XX년 X월 X일 아침이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따라 선영의 아들인 지민이 너무도 어린이집에 가길 싫어해 바로 옆 동에 사는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출근길에 오른 것이었다.
“그래, 좋아. 엄마 집에서 30분만 더 가면 되니까 아슬아슬하게 안 늦을 수 있겠어”
출근시간을 가늠해보며 액셀을 밟으려던 찰나, 봄비 치고는 세차게 내리고 있는 날씨에도 생명력을 뽐내며 어지럽게 피어 있는 개나리며, 진달래 군락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그래, 이 흙내음!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았더라’, 라고 생각하는 사이, 그녀가 몰던 차는 우회전 차선에 진입해 곧 다리를 건너야 했다. 코 끝에 은은하게 돌던 흙내음에 취해있던 사이, 선영은 XX교 다리에 들어서기 직전에 차를 세우고야 말았다. 갑작스러운 정차로 뒤 따라 오던 운전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소리를 지르고 연신 빵빵 클락션을 울려댔다. "설마... 이 다리?" 꿈속 남자의 모습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선영은 오늘 업무 회의가 있어 늦으면 안된다는 팀장님의 신신당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일 빠른 길인 XX교 다리를 건너지 않고 우회로를 택했다.
몇 시간 후, 뉴스가 보도되었다. XX교의 일부가 붕괴되어 13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6명은 현장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사망했음을 공식 확인했고, 나머지 7명은 여전히 잠수 다이버를 동원해 시신을 수색중이라는 것이었다. 꿈속 남자가 전하려 했던 경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은 살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꿈 속 정보로 자신만 간신히 살았을 뿐, 다른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남자는 그 이후로 꿈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30여년이 지났다. 선영은 이제 70대가 되었고, 그날의 일은 살아남은 자의 여느 기억처럼 “천만다행”이라는 단어로 수식 가능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기억으로 잊혀졌다. 그 사이 선영은 남편과 죽네사네 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아들인 지민이도 잘 키우고 무던하게 살아왔다. 70대가 되어 약간의 피로감은 있었지만 아직 일을 하기에는 더 힘이 남아 있음을 느끼는 선영이었다. 인천공항까지 아들 내외를 픽업할 수 있을 만큼의 열정과 체력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아들인 지민은 자랑스럽게도 국내 최고 대학에서 학위를 하고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아 박사과정과 포닥과정을 마쳤다. 다행히 한국의 어느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연구위원이 되어 오랜 방랑자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들어오는 날이었다. 거의 10년만이니, 갓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지민 내외와는 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물론, 그 동안에 줌이니, 스카이프니, 페이스톡과 같은 영상매체는 많이 이용했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아들인 지민이가 하는 연구과제는 늘 자랑스러움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예를 들면 잘 보존된 죽은 선대의 DNA를 활용해서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했지만 가능한 건지 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지민이는 늘 이런 불평들을 자주 했다.
“메세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메시지가 잘 전송이 된 것인지 모르겠어”
“움직임이 석연치 않고 꼭 게임에서 팔다리가 따로 노는 NPC를 다루는 느낌이야, 엄마”
“목소리까지 전달하려면 음성복원기술도 필요해서 한 단어에 30일이나 걸린다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민은 죽은 선대에게 전한 메시지가 과연 잘 수신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이토록 연구에 매진하는 아들이라니, 어떤 날은 몇날 몇일을 밤을 샜다고 하니 아무 쓰잘데기 없는 연구에 이렇게 까지 목숨을 걸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윽고 도착시간보다 약간 지연된 1시간 후 짐을 찾아 나온 아들 내외의 모습에 선영은 할 말을 잃었다.
서글 서글한 눈매 밑으로 진 주름과 아래로 쳐진 입술!
40대 초인 지민은 정확히 꿈 속에서 본 그 남자였던 것이다. 영락없이 자신의 친정아버지를 닮은 중년에 접어든 지민을 보면서 선영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 기술은 오직 DNA를 공유한 사람에게만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지만, 기술적 한계로 매달 한 글자씩밖에 보낼 수 없었다는 것.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던 그 남자. 아마도 선영은 지민의 그 메시지가 없었다면 30여년 전 그날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남겨진 어린 아들은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며 생 떼를 써 굳이 그 다리를 건너게 한 자신을 후회하며 살았을테고, 엄마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엄마의 DNA를 이용해 꿈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실험을 했을테지.
아들이 자신의 덩치만한 캐리어를 끌며 선영 앞으로 다가오자, 선영은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잘 왔어, 아들. 그리고 네 실험이 성공해서 고마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