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바보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열쇠를 주움
질문을 활용한 글쓰기(2)
작은 산골 마을인 '용미골'은 평범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지냈으며,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풍경과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당산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두 쪽으로 쪼개지는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마을의 신인 당산 나무가 쪼개졌으니 곧 재앙이 내릴거라고 벌벌 떨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예측한 재앙 대신에 오래된 나무 속에서 기이한 모양의 열쇠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열쇠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이와 날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어딘가를 열게 만든 모양새로 생겨 사람들은 열쇠로 불렀다. 이 열쇠는 오래된 흔적은 있었지만 오히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상하리만큼 깨끗하고 빛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열쇠를 야트막한 당산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당산 나무가 쪼개졌다는것도 깨름칙했거니와 그 열쇠를 옮길 용기있는 자는 이미 외지로 다 떠났기 때문이었다. 용미골에는 그저 당산 나무에 오래된 신이 있다는것을 믿는 노인들과, 철모르는 어린애들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오래된 당산 나무에서 발견한 만큼 열쇠는 곧 주민들의 관심을 끌었고, 사람들은 지나갈 때마다 그 열쇠를 보며 궁금해 했다.
"도대체 어디에 쓰는 열쇠당가?"
"만지지 말어. 이 열쇠가 어디 열쇤 줄 알고! 열쇠 까딱 잘못 만졌다가 당산 나무신님이 노하신다"
"어허, 뭔가 잠그거나 열때 쓰는게 열쇠인디, 덩그러니 열쇠만 있으니, 어디, 저승 문이라도 여는 열쇠일까 무섭구먼"
다들 겁에 질려서 열쇠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열쇠의 용도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열쇠는 마치 몸단장을 하고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맨들 맨들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해가 흐르고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용미골의 착하지만 불쌍한 바보, 덕춘씨가 일을 저지른것이다. 야트막한 당산에서 빗길에 미끌어지면서 몇번 구른 후 자신의 열쇠인줄 착각하고 냉큼 집어온 것인데, 열쇠를 집어오면서도 덕춘씨는 그 열쇠가 자기 집 열쇠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덕춘씨가 자신의 집 현관문에 꽂으면서 자신이 알던 그 열쇠가 아님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분명히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쓸쓸해지고 초라해진 자신의 집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서는 무심하지만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뭐 혀. 어서와. 니 엄니가 끓인 된장찌개 다 식겄어"
"아유, 여보. 농삿일 하니라고 힘든 애를 왜 자꾸 재촉해. 우리 어디 가는것도 아닌데. 덕춘아, 어서 와서 먹어. 배고프지?"
덕춘씨는 셈에 약하고 농사재주는 좀 부족했지만 자신이 평생 품어왔던 소원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당산 나무가 벼락에 맞기 몇 해 전, 스무살이 되기 전에 차례차례 돌아가신 부모님. 그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그 집. 늘 꿈속에서만 떠올렸던, 따뜻한 저녁 식사와 부모님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그 곳. 열쇠를 손에 쥐고 문을 열자, 덕춘씨는 그 곳으로 오게 된것이었다.
집은 덕춘씨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마당에 놓인 작은 나무 의자, 담장을 따라 핀 꽃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주방의 노란 불빛. 머리맡에 놓인 아버지가 즐겨부르시던 하모니카며 풋고추 냄새가 아릿하게 배어 든 된장찌개 냄새까지. 허연 쌀밥과 함께 바글바글 끓는 된장찌개를 푹, 한입 떠서 먹는데 덕춘씨는 괜히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오랜 세월 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온기. 그 순간 덕춘씨는 사무치게 행복했고,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바보같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무한한 응원때문에.
덕춘씨는 그 뒤로 늦게까지 농삿일 하는것을 그만두고 할일만 딱 마치면 집에 들어갔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 아버지를 열쇠로 문만 열면 만날 수 있다니 그건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 용미골 사람들은 갑자기 없어진 당산 나무 열쇠와 덕춘씨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온종일 침울해 하던 덕춘씨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덕춘씨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부모님은 뭐랄까, 당산나무가 벼락에 맞기 전 그러니까 몇해 전 그대로였다. 덕춘씨가 혼자 살아온 시간은 그들의 기억 속엔 없는 듯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것들이었다.
"명준이네 어머니는 아직도 오늘 내일 하시냐?"
"엄마, 그 할머니는 몇년전에 돌아가셨잖아"
이런식의 대화가 몇번 오가고 나자 덕춘씨는 어머니가 동네 일을 물을 때마다 대답을 회피해야 했다. 아버지는 덕춘씨가 혼자 외롭게 살아온 날들에 대해선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곧 덕춘씨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 공간은 기억이 만들어 낸 공간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고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것. 만약 여기 남는다면, 덕춘씨의 삶은 완전히 이곳에 갇히게 될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저녁, 여느때처럼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산 나무 열쇠가 덕춘씨의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내 기억 속 세계다. 네가 이곳에 오래 머문다면 더 이상 현실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덕춘씨는 열쇠를 쥔 채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선 부모님이 살아계셔. 나는 여기서 행복해."
열쇠는 조용히 다시 속삭였다.
"이곳은 마을을 지키면서 보아온 내 기억으로 만든 환상일뿐이야. 진짜 세상에서의 삶을 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봐."
다음날 아침, 덕춘씨는 부모님과 함께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따뜻한 빛 속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너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는디, 무슨 일이 있어?"
덕춘씨는 한참이나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난 여기가 기억이 만들어 낸 공간인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냥 엄마 아빠가 있는 이 공간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었어요. 이제 나는 내 삶을 살아가려고 해요. 비록 진짜 현실의 내 삶에 엄마아빠가 안 계신다고 해도요."
덕춘씨는 농사기구와 열쇠를 다시 쥐고 문 앞에 섰다. 부모님은 미소를 지으며 덕춘씨를 배웅했다.
"언제든 다시 오렴. 우린 여기 있을게."
덕춘씨는 울면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빛에 휩싸이며 다시 차갑고 냉랭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덕춘씨는 그 열쇠를 여러 번 쳐다보았다. 물론 소리내서 엉엉, 울고 싶은 날은 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부모님에게 안겨 한참이나 하소연을 하였다. 부모님과의 기억은 당산 나무가 만들어 낸 환상이었지만, 그것은 덕춘씨에게 따뜻한 위로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를 주었다. 이제 덕춘씨는 용미골의 불쌍한 바보가 아니었다.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어른이 된것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