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
(스포주의_)
정말 정말 이상하게도, 이렇게까지 한 줄로 정의되지 않는 작품을 만난 적은 없던 것 같다.
청춘물의 특징이 재미있고, 웃기고, 아프게 성장하고, 아프게 사랑하고... 뭐 그런 것들의 연속이긴 하지만 이 작품처럼 그런 감정의 폭이 널뛰듯 했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회차를 보던, 너무 웃긴 말과 행동에 다시 보기를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어떤 회차를 보던,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한 회, 한 회가 온 마음, 마음에 다 담기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나 말이 좋은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책과는 또 다른 감정들을 느낄 수 있어서인데.
글을 내 식으로 상상을 해야 하는 책과는 다르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착 붙는 캐릭터로써 글들을 좋은 말로 뱉을 때의 순간이 미치도록 좋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남주혁과 김태리는 그런 글들을 말로써 정성 들여 해준 배우들이었다.
그런 캐릭터들의 말과 말. 장면, 장면이 사람을 온기 있게 만들었다.
행복했다.
어린 시절 펜싱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던 희도(김태리)는 좀처럼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는 열여덟 펜싱선수다. IMF로 학교의 펜싱부는 사라졌고 비록 지금은 잘 못해도 펜싱을 너무 사랑하기에 포기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펜싱을 지키고 싶은 희도는 엄마에게 펜싱부가 있는 태양고로 전학 보내달라 하지만 엄마는 잘하지도 못하는 그깟 펜싱은 이제 그만하라며 그날 아침도 희도와 엄마는 대차게 싸우고 있었다.
화가 날대로 난 희도가 집을 나오자마자 본 건 이진(남주혁)이 배달하는 신문에 맞아 오줌 싸는 소년 동상의 그곳이 부러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희도는 그것을 보자마자 이진에게 버럭 화를 낸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희도에게 얼마를 배상하면 되냐고 묻자.
희도는 "모르지. 나는 그냥 화를 내고 싶었어. 화가 나니까!!!!"라고 소리를 지른 뒤,
아주 쿨하게 "조심히 가."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고성과 화난 순간이 희도(김태리)와 이진(남주혁)의 첫 만남이었다.
엄마에게 기대어 전학 가는 것은 애초에 되지 않는 계획이라 판단한 희도는, 나이트를 갔다가 경찰서에 가게 되어 강제 전학 당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트에 어른인 척 간 희도는 우연히 이진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 중 한 명은 IMF로 망한 이진에게 비아냥과 조롱을 한다.
이진은 그동안 그들을 친구라 생각했기에 어렵지만 도움을 청하고자 간 자리였지만 돌아오는 친구의 냉대가 참아지지 않았고 그곳에 있는 희도는 더 참아지지 않았다.
이진의 손에 이끌려 나이트에서 나오게 된 희도는 자신의 강제전학 계획이 망했다며 화를 낸다.
이진은 자기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애초에 틀린 계획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거라 얘기해준다.
언제까지나 집은 잘 살고, 가족들은 몹시도 화목하며, 그런 순간들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어린 이진이었다.
하지만 IMF로 한순간에 집이 망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며 절망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이진에게 희도의 행동들은 새로운 자극이기도 했다.
더 이상은 잃은 것에 대해 생각지 않고 얻을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진 순간들이었다.
그날도 희도는 엄마와 대판 싸웠다.
화가 난 엄마는 희도가 그렇게나 아끼는 만화책인 풀하우스를 창 밖으로 던져버렸고, 책은 찢어졌고, 찢어진 부분 부분은 물에 젖기까지 한다.
그때 이진은 책을 반납하라며 희도에게 음성을 남긴다.
만화책의 찢어진 부분을 직접 그려 넣은 채 몰래 책을 반납하려 했지만 이진에게 딱 걸린 희도.
엄마가 풀하우스를 찢어버렸다며, 우엥~ 울며 대차게 내달리는 희도를 보며 이진은 당황한다.
풀하우스의 상태를 본 이진은 희도가 써놓은
"외 않 되' 세 글자에 자지러진다.
놀랍게도 지금껏 내가 써내려 온 세 씬 모두 1화에서 벌어진 일이다.
놀라운 전개였다.
이진이 때문에 한참을 슬퍼했던 1화의 마지막이 이렇게 희대의 맞춤법 외.않.되를 남기며 끝났다.
나는 이 드라마의 이런 퐁당퐁당이 좋다.
너무 슬프지만도, 너무 달콤하지만도 않게 그린 게 이 드라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당위였다.
희도를 만나고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자신의 상황 때문에 슬프고 속상한 나날의 연속이긴 했어도 희도로 인해 시끄러운 순간순간이 꽤나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도 빚 받으러 온 아저씨들의 넋두리,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을 눈물로 서있던 이진이었다.
그리고선 말한다.
"아저씨들의 고통을 늘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대신,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겠습니다."
겨우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스물둘이 살아내기엔 너무나 가혹한 현실과 말들이었다.
그의 축 처진 어깨가 그의 삶을 너무나 많이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말로도 이진을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 희도는 얘기한다.
"자신은 돈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고, 돈 갚으러 온 사람이라고."
열여덟의 위로였다.
그러나 고작 열여덟이 하기엔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은 위로였다.
찢어진 만화책 값을 갚으러 온 희도는 돈을 갚는 대신 슈퍼에서 이진에게 슬러시를 사준다.
그러면서 이진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이진은 나사(NASA)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누가 봐도 나사가 뭔지 잘 몰라 보이는 희도였다.
희도의 퉁명스러운 표정과 민망한 듯 슬러시를 한껏 흡입하는 모습은,
앞서 이진이 아저씨들에게 눈물로 "앞으로는 자신도 절대 행복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던 씬 뒤에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의 이런 점이 너무 좋다.
이런 농담이 정말 진심으로 행복하다.
숙제가 많다.
자신의 고백을 여자 친구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이런 열여덟의 했던 고민들이 그립다는 힘없는 이진에게 희도는 학교 수돗가에서 분수를 만들어 보여준다.
이걸 보면 잠깐 동안 행복하지 않냐며.
그걸 본 이진도 잠시 행복해진다.
아니 어쩌면 그 분수에 행복해하는 희도를 보며 자신도 덩달아 행복해 진건 아닌가 싶다.
한참을 수돗가에서 이진과 희도는 물장난을 치고 그 모습을 본 경비아저씨는 화를 내며 달려온다.
그리고 둘은 냅다 도망친다.
물로 젖은 옷과 머리, 막 내달린 탓에 떨리는 음성으로 희도는 말한다.
"앞으로 우리 가끔 이렇게 놀자."
"싫은데?!"
"싫어도 해!"
"왜?"
"네가 그 아저씨들한테 그랬잖아.
앞으로 어떤 순간에도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난 그 말에 반대야.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근데 너는 그 아저씨들한테 약속했으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해지는 거야.
둘이 있을 땐 아무도 몰래 잠깐만 행복하자.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나는 2화의 마무리에서 이 드라마가 16화까지 어떤 이야기를 그릴지와는 상관없이 이 작품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하고 싶은 말, 주제를 다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했고,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자 가장 가슴이 먹먹한 장면,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벅차오르는 장면이었다.
이진에게 희도의 말은 위로이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그런 응원의 말을 한 희도를 보며 이진이 서서히 미소를 머금으며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나는 이진이가 '더 이상은 슬픔이 없었으면 좋겠다.',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장면 하나로 이 드라마의 몫을 다 했으며 가장 완벽한 엔딩이라 생각했다.
이 둘에게 서로는 그런 존재였다.
둘이 있을 때, 아무도 몰래 잠깐만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그린 사랑의 시작이자, 전부였다.
희도의 응원에 나아가기 위해 이진은 열심히 산다.
그렇지만 이진의 취업길은 여전히 막막하다.
매번 떨어지는 것에 익숙보단 실망이 더 크다.
희도는 그렇게 술에 취한 이진에게 말한다.
"모든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면 마음이 좀 나아져. 그냥 놀려줘.
그러고 보면, 백 프로의 비극도 희극도 없는 것 같아.
그래도 너랑 내 앞에 놓인 길엔 희극이 비극보다 더 나아졌으면 좋겠어."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이진에게 희도의 말은 진정으로 비극이 희극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겁고도 무거운 삶의 무게를, 비극을, 그렇게 희극으로 바꾸는 순간이었다.
국가대표 평가전에 나가게 된 희도를 이진은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너는 평가전에 나온 선수 중에 가장 많이 져 본 선수야. 천천히 올라가서 원하는 걸 가져."
"넌 날 왜 응원해?"
"기대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자꾸 욕심이 나. 나도 잘 해내고 싶은 욕심."
"나의 어디가?"
"모르겠어. 네가 노력하면 나도 노력하고 싶어져.
네가 해내면 나도 해내고 싶어져.
너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해.
내 응원은 그런 너에게 보내는 찬사야."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
그게 현실에서 그렇게 평범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온 마음으로 응원을 한다는 것.
그 사람을 온 마음으로 친애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지금이다.
빚쟁이들이 동생에게 찾아오는 것 까지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이진이었다.
희도의 평가전 날.
희도에게 말도 못 한 채 동생을 데리고 외가댁으로 떠나온다.
그렇게 생선을 팔고 꿈은 접은 채 도망친 이진의 삐삐에 메시지 하나가 와있다.
"네가 사라져서 슬프지만 원망하진 않아.
네가 이유 없이 나를 응원했듯이, 내가 너를 응원할 차례가 된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네가 있는 곳에 내 응원이 닿게 할게. 내가 가서 닿을게."
이진의 숨통을 트이게 한 희도의 메시지였다.
이진도 그런 희도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보고 싶었어. 근데 봤어. 네가 보여줘서. 그래서 오늘은 웃었어.
풀하우스 14권은 나왔어? 15권 나오기 전에 나타날게.
기다려. 희도야."
또 한 번 비극을 희극으로 바꾼 순간이었다.
풀하우스 15권이 나오기 전에 이진은 희도에게 돌아왔다.
이진은 돌아왔지만 희도는 그로 인해 엄청나게 다양한 감정들을 겪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진이 방송부였던 시절, 녹음해 놓은 "사랑해 다은아."라고 하는 테이프를 우연히 듣고 기분이 한참 가라앉기도 했고,
이진의 이삿짐 속에 민영이라는 여자와 찍은 스티커 사진에 질투도 났다.
이삿짐 정리를 도와주다 운동기구로 장난을 치던 희도는 이진의 집 유리창을 깼고 희도가 치우려 하자 위험하다며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는 이진에게 멍하니 설레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감정을 겪던 희도에게 버스에서 우연히 본 이진의 모습은 가깝고도 멀었다.
일 때문에 모르는 말로 전화통화를 하는 어른 같은 이진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맞춤법이나 틀리고 빵 속 스티커나 모으는 애란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열등감인지 질투심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감정으로 이진의 장난에 온갖 말을 쏟아낸 밤이었다.
(분량 거리 조절 실패로 인해... 두 편으로 나누어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