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일기(14)
퇴근길. 머리가 무겁다. 대중교통을 타고 내리고 갈아탈 엄두가 안 난다. 택시를 부른다. 적당히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다가. 그냥 친한 후배에게 전화를 건다. 바쁠 시간. 그냥 했어. 수고해.
일거리를 들고 왔지만 노트북을 펼 기분은 아니다. 오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냉장고에 와인이 반 병쯤 남아있다. 어제도 마셨다. 안주는 입맛을 돋울 필요가 있다. 르쿠르제 냄비에 올리브오일 충분히 두르고 새우, 마늘, 만두, 양파, 버섯 등을 넣고. 몇 번 뒤적이며 익혀준다. 내 스타일의 감바스다. 와인은. 더 마시고 싶지만 없다. 참는다. 허기가 남는데. 차라리. 130g 현미햇반을 돌려 김 싸 먹는다.
설거지하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샤워할 의지가 없다. 일단 몸을 좀 누인다. 기분을 좀 전환하려.. 후배랑 카톡으로 약속을 잡고.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인 듯. 오늘 고생 많았어! 편안한 밤을. 그냥 잠시 또 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이런 기분 상태에 뭐 대단한 수다가 있겠냐만 안부를 묻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다.. 회사생활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를 꺼낸다. (내 기분 상태가 말 거리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언니는 좀 듣다가. 자신이 '감정쓰레기통'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아는 말이다. 하소연이 잦으니 듣기 싫다는 거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알았다고 끊는다. 더 이상 전화할 곳이 없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것들을 본다. 유튜브나 인스타나 숏폼이나 뉴스나 뭐 등등.. 씻어야 하는데. 몸을 조금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벽이 무겁다. 오늘 요가 재등록해야 하는데. 아니면 러닝이라도 하는게 나을텐데.. 생각뿐이다. 나갈 의지가 없다. 씻어야 하는데. 일어나 씻을 의지가 없다. 누워서 반쯤 깨고 반쯤 잠들고. 몽롱한 상태가 이어진다. 우울증 환자에게 그냥 쉬운 거 한 가지만 시작하면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예를 들면 그냥 샤워를 하거나 쓰레기 버리러 밖에 나가거나. 뭐 그런 류의 것들이었다. 그 말이 좀 공감되는 날이다. 시간이 좀 걸렸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를 조심스레 꿈틀 하는 기분으로. 움직였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다. 상쾌하기 그지없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좋아하는 일. 빨래가 깨끗해지고 보송보송 마르는 느낌이 좋다) 창문을 열어본다. 찬 바람이 살살 밀려들어온다. 인센스 스틱에 불을 붙인다. 좋은 향이다. 얼굴에 팩을 올리고 커피를 내린다. 명상 음악을 플레이한다.
우울한 상태.라는 건 일상적이기도, 갑작스럽기도 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가깝다.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이다. 어떤 일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이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혹은 그냥 보통의 일상에 감정 폭이 떨어지기도 하다.
다른 날의 아침. 에 조금씩 움직이며. 지금 좀 살아났다. 오늘도 의지를 가지고 좀 살아봐야 하는데. 의지를.기력을.기분을 깨워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