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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용운 Oct 04. 2022

페루까지 가서 마추픽추에 가지 않았던 J에게

2018.2.6. 페루 마추픽추 유적지 안에서

 안녕 J야! 아프리카 여행 안전하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넌 내가 아는 가장 특별한 여행가 중 하나야. 중고 학원 버스를 개조해 러시아를 횡단하고 유럽을 지나 아프리카까지 갈 생각을 하다니. 감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생긴 차질 몇 년이 미뤄졌지만 결국 계획을 실행에 옮겼구나. 정말 대단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넌 뭔가 비범했어. 페루 쿠스코 공항에서 처음 만난 너는 반팔과 얇은 긴바지, 슬리퍼 차림을 하고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있었어. 몇 개월 동안 여행했으면서 짐이 그거 하나라니 놀라웠어. 나는 너에게 쿠스코에 왔으니 마추픽추에 갈 예정이냐고 물었어. 너는 가지 않겠다고 했어. 나는 또 한 번 놀랐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마추픽추를 안 가지' 잠깐 생각했어. 그 다음날 너와 함께 만난 S도 아르헨티나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면서 이과수 폭포를 보지 않았다고 했어. 큼직하고 유명한 관광지 위주로 경로를 짰던 나는 너희들의 선택이 흥미로웠어.



 J야! 내가 찍은 마추픽추 사진을 보고 의외로 많은 친구들이 자신도 일생에 한 번 꼭 마추픽추를 가보고 싶다고 말했어. 그들에게 마추픽추는 어떤 의미의 장소일까. 생각해보면 나에게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은 없었어. 다만 페루에 왔으니 으레 마추픽추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었지.


 물론 마추픽추는 신기했어. 잉카인들은 어떻게 무거운 돌을 옮겨서 이런 험한 산속에다 정교한 도시를 만들었을까 감탄했어. 여길 발견한 사람도 대단하고. 전날 비가 쏟아져서 올라갈 때만 해도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점차 해가 들면서 안갯속에서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적의 아우라가 대단했어. 유적을 다 보고 나오면서도 떠나기 아쉬워서 계속 뒤를 돌아봤지.



 마추픽추에서 내려와 쿠스코 마을에 도착해서 너를 다시 만났어.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을 때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어. 우리가 경험한 순간순간을 반추하면서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불편했는지 이야기했어. 헤어질 때쯤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여행을 지속해나갈지 이야기했어. 우리가 나눈 건 취향에 대한 대화였어. 우리는 어떤 것에 끌리며 어떻게 하면 나의 취향대로 내 삶을 이끌어나갈지 고민한 거지. 그곳에 모인 친구들 모두 자신의 선호가 뚜렷하면서도 타인의 선호를 존중할 줄 알았어. 그래서 난 우리들의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마추픽추 유적지보다 조금 더 내 취향이었어.



 J야!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지. 우리가 어딘가에서 보고 듣지 않은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어. 나만의 독특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모두 어딘가에서 학습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러나 그런 무수한 바람 중 내가 가장 행하고 싶은 것을 골라서 실천하는 건 각자의 몫이야. 경험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취향을 더 잘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쉽게 갈 수는 없는 곳을 정해 가장 편리한 경로를 계획하고, 정작 그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상호작용을 더 즐기는 건 나의 취향이야. 아주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낯선 장소 무작정 찾아가서 새로운 상황과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너의 취향일 테고.


 우리 사회도 우리의 모임처럼 다양한 욕망의 조합이 더욱 인정받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의무, 역할, 자본, 정상 범주에 억눌린 삶이 아니라 경험과 가치가 더욱 중시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페루에 가면 당연히 마추픽추에 가야지'라는 말보다 '페루에 간다고 해서 꼭 마추픽추에 갈 필요는 없지'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운 안전한 사회를 꿈꿔봐.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 더 네 멋대로 살아줘.


202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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