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사랑도 못 받는 사람
살며 많은 것들을 받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또 선물을 받았다. 이 선물들은 숙제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나만 해결할 수 있는 숙제.
지금껏 삶에서 내가 받은 선물들은 참 힘들고 버거웠다. 선물 사 주는 사람들, 내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도 봤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내게 잘해줬다. 평생 무게를 짊어져야 할 것 같았다.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는 사랑과 관심 그 자체가 버겁더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게 싫더라. 나를 좋아하면 내게 선물을 주고, 내게 기대를 품을 텐데 나는 갚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아무것도 갚을 수 없었다. 왜냐고? 아마도 가난해서? 내게는 안정적인 용돈이 없었다. 가끔 받는 용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부모님께,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청소년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건 어른들이고, 그건 청소년의 자아존중감을 갉아먹는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
친구들이랑 노는데 필요하다는 이유 같은 것 말고 부모님이 인정할만한 사유가 필요했다. 당연히 주로 공부. 나중에는 부모님께서 책을 그만 사고 도서관 가서 빌려 보라고 하셔서 그나마도 효력을 잃었다. 다음 단계는 셀프 해결이다. 아르바이트를 허락하지 않는 부모님 덕분에 밥을 굶고 급식비를 용돈으로 써야 했다. 오 마이 갓! 그래도 부족하다니!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편도 2시간을 걸어 다녔다. 이런 상황이니 친구들과 마음을 나눌 돈은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항상 내게 뭔가를 해줬다. 편지를 써줬고, 선물을 해줬다. 매점에 데려가 간식을 사줬고, 부모님이 사주신 고급 간식을 나눠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나눠줬던 쟈뎅 커피가 아직도 생각난다. 2004년, 청소년에게 대중화된 카페는 캔모아뿐인 시절. 나는 레쓰비 캔커피나 맥심 스틱커피를 겨우 사 먹을 수 있었는데 내 친구는 쟈뎅 커피를 먹었다. 캐러멜 마키아토, 카페모카, 바닐라라테 이름마저 고급스러운 커피였다.
친구가 커피 가루를 컵에 부을 때 교실에 퍼지는 달콤 씁쓸한 향기, 물을 부을 때 생기는 하얀 거품이 너무 신기한 시절이었다. 내 소중한 친구는 가끔 내 커피도 챙겨줬는데 그럴 때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럽던지.
나는 이 커피를 갚을 수가 없는데 이 커피를 받아도 될까? 나는 내게 좋은 게 생겨도 너랑 나눌 수가 없어 ㅜㅜ
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는지, 결국 친구에게 털어놓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피를 받을 때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느라 침묵하던 기억 속 내 모습이 안쓰럽다.
내 친구는 그 커피를 꽤 자주 먹었다. 어떤 날엔 내 것도 있었고 어떤 날엔 친구 혼자 마셨다. 친구가 혼자 커피를 마시는 날에는 혹시 내 친구가 불편할까 봐, 내가 그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까 봐 열심히 쿨한 척을 했다. 안 먹고 싶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도 부끄럽고, 괜히 친구의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되는 마음도 들어서 아예 커피 마시는 장면을 모른 척하는 식이었다. 이런 소심함을 내 친구는 알았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 친구에게 받은 것들을 다 돌려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친구 말고도 내 인생엔 수많은 선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참 좋고 멋진 사람들이었다. 손편지, 문구류, 옷, 우산, 간식, 맛집, 쿠폰, 셜록홈스 우산, 방탄소년단 앨범, 아이패드, 각종 콘서트와 토크쇼 입장권, 일자리까지 다양한 것들을 받았다.
친구들, 지나간 연인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시민사회 활동가들 그 누구의 사랑도 아직 다 갚아내지 못했다. 참으로 빚쟁이 같은 생이다.
분명 나도 뭔가를 그들에게 선물하긴 했다. 이상하게도 내 마음엔 그저 받은 것들만 새겨져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나의 애인은 선물을 퍼부었다. 주문제작 수제 케이크, 목도리, 니트티, 플레어스커트, 소고기, 영화, 나이키 운동화까지 너무 많은 선물을 받았다. 에어 팟을 사주겠다, 정장을 사 주겠다, 공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학원비를 지원해주겠다는 애인의 마음은 그나마 거절한 거였다. 나는 여전히 가난해서 이 많은 선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준 것들만큼을 네게 해줄 수 없어.
나) 지난 주말 동안 나한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줬는지 알고 있어?
너) 아니? 그걸 왜 기억해? 앞으로도 그렇게 해 줄 건데~
나) 근데 나는 이렇게 받는 게 너무 어렵고 마음이 복잡해.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해줄 수가 없어.
너) 괜찮아. 받고 싶어서 해주는 거 아니야.
나) 나는 사랑받는 게 어려워. 내 사랑의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맨날 넘쳐흘러.
너) 괜찮아. 매일 넘쳐도 돼. 앞으로 매일 넘치게 해 줄게.
그냥 이렇게 위로받고 따뜻한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수없이 끄덕이며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밤을 하루하루 쌓는 것이 내겐 꿈으로도 꿔보지 못한 행복인 것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다가 이제는 다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밤. 내 마음을 지켜내는 이 사람의 존재가 너무 뜨겁다.
나도 이제는 달라질 거야! 거침없이 사랑받고 아낌없이 사랑 표현하며 살 거야. 이제 선물 앞에서 어두운 얼굴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할게. 내 사랑이 아직은 조금 어설프고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볼게.
여러분도 나한테 받으면서 살아줘.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럴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서로 아끼며 또 하루씩 살아 보자고.
이미 나를 지나간 이들에게 이제야 연락하긴 어렵겠고 지금 내 곁의 뜨거운 사람들, 뜨뜻미지근한 사람들과 마음은 나누는 일이 시작점이 될 것 같아. 상담소에서 만나는 내담자들과도 열심히 온기를 나눠야지. 그렇게 결심하게 되는 이번 크리스마스 밤이 너무 소중하고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