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 (수)
참 고요하다. 저녁 6시 반, 진료시간은 벌써 끝났지만 나를 포함한 3명의 환자가 아직도 원장선생님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뭐라도 읽어야 하는 나는 브런치에서 '감정일기'를 검색해 봤다. 감정일기가 대체 뭐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감정일기라고 정의하고 써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제는 한 내담자의 정신과 진료에 동행했다. 의사 선생님은 리더십이 있는 편이셨는데, 리더십보다는 감정에 대해 질문하는 모습 자체가 참 뭐랄까, 눈부셨다고 해야 하나?
"네, 어떤 일로 오셨나요?"
"많이 힘드시죠. 하루 중 언제가 가장 힘드세요?"
"불안한 느낌은 어떠세요?"
"죄책감을 느끼고 계신 것 같아요. 환자분 잘못이 아니에요."
"많이 무기력하고 그러신가요?"
"회사에서는 좀 어떠세요?"
질문을 들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는 내담자를 보며 우리가 일상에서도 서로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다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싶은 상상을 해본다.
"안녕~ 오랜만이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 아 그래? 많이 불안하지는 않고? 하루 중 어떤 시간이 제일 좋아? 어떤 시간이 제일 싫어? 요즘은 주변 사람 중 누구에게 제일 마음을 쓰니? 요즘은 어떤 음식이 좋니? 요즘 널 힘들게 하는 일은 없니?"
흠..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나는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데 무디고 인색한 편이다.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활동가 친구까지 각 시기마다 감정에 관련된 책을 선물해 주었다.
나도 가끔 의심한다. 어쩌면 내가 사이코패스는 아닐까. 왜 이렇게 감정을 인식하기가 어렵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보면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러면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아, 나한테도 감정이 있네. 싸패는 아닌가 보다. 다행이다.
그러다가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도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느끼고 공감할 수도 있다던데? 뭐야, 그럼 역시 사이코패스인가.
이런 나의 인식과 다르게 정신과 검사에서는 이런 부분이 부각되어 나오진 않았다. 그냥 내가 감정에 대해 인식, 인지 둘 다 못 하니까 둔감해서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컵에 물이 100까지 가득 차 있어도 컵 밖으로 물이 흘러넘치지 않는다면 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달까. 감정을 잘 인식하는 사람은 컵에 미세한 눈금이 있어서 10까지 찼군, 30까지 찼군, 90까지 찼군 곧 있으면 흘러넘치겠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세세한 눈금이 없달까... 심지어 다른 사람들 말에 따르면 나는 감정이 풍부한 편이라던데.
몸도 기가 막히다. 배가 고픈 것, 몸의 어딘가가 아픈 것, 몸이 불편한 건 기가 막히게 반응이 빠르다. 문제는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 많더라? 나는 양반이지.
근데 오늘 의사 선생님께는 대체 무슨 얘길 해야 할까? 제가요. ADHD 약으로 바꾼 1주일 동안 사람을 죽이는 꿈을 계속 꿨어요. 일은 전보다는 좀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조울증 약 때문인지 ADHD 약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요.
결국 조울증 약을 다시 받았다. 이번에는 종류가 다른 약이다. 콘서타를 1주일 밖에 못 써봤는데 바꿔도 될까? 일단 의사 선생님 믿고 해 봐야지. 일주일 동안 또 잘 관찰해 봐야겠지.
막상 조울증 약-리튬을 받고 오니 내가 원하는 걸 조금 알겠다. 그래. 나는 내가 조울증이 아니길 바라는구나. ADHD이길 바라는구나. 뭘 바라지 말아야 할 텐데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바라는구나. 조울증의 어떤 면을 나는 무서워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