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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May 25. 2019

숨고 싶은 날

막다른 골목에 서서.

우울감이 올라오고,

나는 가라앉는다.

더 어두운 곳으로.


고민 많은 날이 아니라 없던 고민도 만들어내는 날이다. 20명 넘은 우주가 한 집에 같이 사는 이 곳에서 이런 날은 고역이다.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다. 밥 먹는 자리도 피하고, 얘기하는 것도 피해봤지만 여전히 내 주변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겨우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잠깐 거실에 나와 물을 마시고, 숨통을 열어본다. 거실을 오가는 사람들과 무의식적인 몇 마디를 주고받는, 어딘가 마비된 일상.


다른 곳으로 도망이라도 가볼까. 저녁에 식구의 생일파티가 있다는 소식에 마음을 접는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생일은 축하하는 게 맞으니까. 진짜로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몽롱한 상태로 생일파티에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었는데, 돌아와 열어본 내 휴대폰에는 사진 한 장도 담겨있지 않다. 나는 두 시간 동안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있었던 걸까.


집에 돌아와 있자니 한 식구가 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오늘 해야만 하는 얘기니까 지금 얘기하는 거겠지? 기대감을 갖고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내용은 나에 대한 서운함이다. 생일파티를 앞두고 정성 들여 롤링페이퍼를 준비했는데 내가 그 롤링페이퍼를 보자마자 "쓰레기 같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와우. 브라보. 언빌리버블.

막말이다.

정말 그냥 막말이다.

한치의 변명의 여지도 없는 막말.


어찌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황당하고 기이하다. 식구에게 사과하고 사과하고 또 사과한다. 역시 오늘 같은 날엔 그냥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구나.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줄 몰라 어물쩡 거린 시간이 다른 식구에게 상처가 되었구나. 나를 마주하던가 너를 마주하던가 둘 중 하나는 마주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내가 망설이고 있었구나. 나는 나를 어쩌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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