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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Mar 11. 2019

일방통행

이기적인 감정의 일방통행

요즘은 내 감정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뼈 시리게 느낀다. 
이거슨 사랑이다.


사회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회의, 토론, 모임을 하기도 하고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야근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무채색 어느 날 무채색 반팔티를 입은 그 사람을 처음 봤다. 모르겠다. 하나하나 모두 예뻤다. 웃는 얼굴, 심각한 얼굴, 회의자료를 보는 얼굴, 먼 곳을 보는 얼굴, 한숨 쉬는 얼굴 모두 예뻤다. 분명히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도 무채색인데 이상하게 빛이 났다. 히멀건한 하얀빛이 아니라 따듯한 색깔이었다.    


like this?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내 스타일일 수 있지. 그런 사람 많지. 이게 별거냐. 대수냐. 내 마음을 외면했다. 나는 보통 내 마음을 외면하며 지낸다(는 친구의 진단). 예전보다 아픔이 많아진 삶이라 누구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진 게 고통뿐이라 나눌 것도 고통뿐인 일상을 타인과 함께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step 1. 각 잡고 가만히 있기

나한테 자신이 없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 계속 저울질했다. 내 마음이 진짜일까? 지금의 나와 함께 할 수 없을 거야. 나를 부담스러워할 거야. 나는 돈도 못 벌잖아. 데이트할 돈도 없잖아? 그 사람한테 짐이 될 거야. 잘돼 봤자 얼마 못 갈 거야. 잘 돼봤자 자주 못 만날 거야. 잘돼 봤자 잘 안 맞을 거야. 잘 안되면 다시는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다시는 못 보게 돼도 좋아? 계속 마주치면 어떻게 하려고? 만날 때마다 민망할 텐데? 그러느니 그냥 가만히 있자. 중간이라도 가자.   

 

step 2. 눈 가리고 아웅

속이고 감추고 치워버리기

옆으로 치우고, 안 보이게 가리고, 감췄다. 나를 속였다. 그냥 그 사람 눈코입이 내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 머리스타일이 내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말하는 게 이쁜 사람이라 부러워서 자꾸 눈이 간다고 말했다. 남을 챙기는 마음이 이쁜 사람이라고 관찰하게 되는 거라고 말했다.    


step 3. 한숨 쉬기. 땅아 푹 꺼져라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그 사람은 나에게 다가갈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하느라 그 사람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일상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들을 마음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상상은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작아졌다. 점점 내가 너무 한심해졌다. 이렇게 몇 달을 지냈다.    


나는 연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습관처럼 연애했던 것 같다. 머리로 한 연애도 아니었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고민 없이 연애했다. 지금 내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이런 게 사랑일까

내가 바닐라라떼 좋아하는 것, 방탄소년단 좋아하는 거랑 뭐가 달라?    
이런 게 말로만 들었던 사랑이란 감정일까? Oh-yeah! (DNA, BTS)


그는 너무 자극적이다. 나는 말을 잃는다. 대신 함께 있었던 공기의 흐름을 기억해둔다. 이후에 한숨 뱉고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한다. 후회하고 기억하고 재생한다. 기억은 추억으로 왜곡된다.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한데 뭐가 궁금한지 잘 모르겠다. 그와의 상호작용이 무섭다. 너무 자극이 크다. 감당이 안될 것 같다. 이런 걸 우리 팟캐스트에서는 ‘미쳐버리겠다’라고 표현했었는데 참 적절한 워딩이다. 작은 결정도 버거운 답답한 나란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자극이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나다. 내가 내 마음을 외면하는 동안 내 마음은 미역 불어나듯, 그렇게 불어났다. 은행 빚처럼, 쓰레기 더미의 쓰레기처럼 하루하루 차곡차곡 불어났다.    


내 마음의 방. 이 방을 꽉 채운 쓰레기.


사라지거나, 잊히거나, 지워지거나.

셋 중에 하나는 가능할 줄 알았다. 빚은 갚으면 없어지고, 미역은 버려도 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쓰레기는? 지금 내 마음은 쓰레기 같다. 안 보이게 치워두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 어느 날 우연히 불이 나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 심지어 쓸모도 없다. 주변에서는 이젠 그만하고 지르라고 한다. 뭘 질러?!!    

쓰레기 다 타버렸으면. 내 마음의 방도 다 타버렸으면. 불태우는 방법은 뭘까.


뭐? 나보고 고백을 하라구우??

나는 고백해본 적이 없다. 고백해서 잘 된 적이 없는 건지, 고백을 한 적이 없는 건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지금까지 연애했던 애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손가락으로 세본적이 있다. 8명? 9명? 그 사람들과 연애 시작할 때 나 어땠을까? 그때에도 그랬나? 도대체 어떻게 연애했던 거냐? 왜 이렇게 모든 일이 처음 같지? 왜 이렇게 모든 감정이 처음 같지?    


그 사람과는 처음이라서 그래.


그럼 받았던 고백의 기억이라도 재생해보자. 쓰레기장 앞에서 받았던 고백이 단연코 독보적이었어. 이렇게는 싫다. 갑자기 키스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건 물론 별로였어. 전화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도 별로였지. 꽃다발 주며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너무 식상했어. 사람들이 이렇게 나한테 마음 표현하는 동안 나야, 뭐했니?


“보라야. 나랑 연극 보러 갈래?”
도서관 앞 벤치에서의 예쁜 기억. 엄청 부끄러워하는 모습 보면서 ‘지금 이 사람이 용기 내서 이야기하고 있구나’ 절절하게 와 닿았던 시간.
“누나, 지금 저 좋아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끔 만나줘요.”
강의실에서 받았던 고백. 이것도 엄청 자극적이었어 -_- 연애의 끝은 참혹했지만..


내가 꿈꾸는 건 뭘까? 내가 두려워하는 건 뭘까?

다른 사람에게 내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살아온 몇십 년 인생이 다시 재생된다. 일하면서만 어려운 게 아니라 연애하면서도 어려웠구나, 과거의 나야. 너참 한결같구나. 새삼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내 옆에서 고생하는 내 친구들, 나 때문에 답답하지는 않니? 옆에 있어줘서 고맙고 사랑해! (뜬금)


오늘도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겠지. 사람들과 눈을 마주 보는 것, 더 자주 살아있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나를 살아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해본다. 죽어있던 나야, 쓰러져있던 나야, 일어나. 가서 고백해.    

고민보다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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