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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Sep 20. 2020

(13) 숙명

숙명(宿命⋅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기자만큼 모순된 숙명을 가진 직업도 없다. 정확하게 써야 하는데, 또 빨리 써야 한다. 빨리 쓰다 보면 당연히 정확도가 떨어지고, 정확하게 쓰다 보면 당연히 늦어지는데, 어느 쪽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애초에 양립 불가능한 목표를 갖고 달려야 하는 셈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아들 군 휴가 특혜' 의혹 한가운데에 섰던 이번 달 초. 또 경쟁 언론에 물을 먹었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꽤 데미지가 컸다. 나에게 물 먹인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이) 한국군 규정을 어겼다"는 의혹이 일자(1), 추 장관 측은 "카투사는 한국군 규정이 아니라 주한미군 규정을 따른다"고 반박했다(2). 그러자 국방부가 "카투사도 한국군 규정을 따른다"고 재반박했다.(3) 


국방부가 재반박했다(3)는 부분이 내가 놓친 '단독'이었다. 경쟁 언론은 국방부 관계자 한 명과 인터뷰했고, 곧장 기사를 냈다. 아마 나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관계자와 통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멘트가 거의 겁친다. 이때 경쟁 언론은 곧장 기사를 냈고, 나는 조금 더 보강취재 해야겠다고 판단(오판)했다. 


그러다 물 먹었다. 다른 국방부 관계자와 한 명 더 통화하고, 변호사 의견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뒤늦게 근거를 보탠 기사를 내긴 했지만, 이미 '2등'이었다. 주목받지 못했다. 반면, 경쟁 언론 기사는 '네이버 많이 본기사 1위'에 하루 종일 올라가 있었다. 편집장은 "배가 아프다"고 그랬고, 나도 그랬다. 


어째서였을까. 국방부 관계자 한 명의 의견으로는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 게 '오판'이었던 셈이다. 거대 이슈였던 만큼 모든 언론이 달라붙고 있었고, 그럴 땐 평소보다 허락된 시간 자체를 앞당겨야 했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시간을 썼고, 그 결과는 당연히 나빴다. 좋을 수가 없다. 


어렵다. 하는 일 자체가 모순적인데, 정확도와 시간 사이를 저울질하는 건 더 어렵다. 더 많은 기사를 읽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편집장은 "1년 전에 쓴 기사를 보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아무렇지 않으면, "성장한 게 아니므로 심각한 것"이라고 했다. 


저 말을 듣고, 작년 이맘때 쓴 기사를 봤다. 희망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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