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의 오답지를 보고 답을 맞히고 있었네

by 위드웬디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10년 넘게 주야장천 문제지를 풀고, 정답지를 보며 채점하며 살던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무사히 대학에 입학을 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어른이 된 후에도 남이 만든 답지에 따라 내 생각과 삶을 바꾸려 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인생을 사신 분들은 말 그대로 선생(先生)님이니까, 내 생각과 조금 다르더라도 내가 틀렸다고 여겼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정답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요.



어른이 그렇다 카모, 다 그런 기라. 이기이 다 너거들 위한 거 아이긋나? 어른 말 들으라카이.


저희 상황이 이러이러하고, 제 생각이 어떻다는 말씀을 차분히, 납득하실 만큼 말씀을 드릴 걸 그랬어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유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이해하실 수 있는 합리적인 분인데.


'모두를 위해서, 어른 말씀은 꼭 들어야 하는 거다'라는 남이 만든 답에 내 생각을 욱여넣은 탓에 분노만 쌓아갔지요.


그 이후로 시댁에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내 자유의지를 묵살하는 강요'로 듣기 시작했고요.


내가 가진 내 삶이라는 답지를 묵살한 건 오히려 나인데.



아범한테 좋은 기이 너거 식구들한티 다아 좋은 기라. 아범이 잘 돼야 다 좋은 거 아이가? 아아들도 적응 잘 할 끼다.

니만 괜찮다꼬 하믄 되는 긴데, 와 이리 말을 안 듣노?


남편의 사주에 따라 이사를 하라고 강요하시는 말씀에 불만을 제기한 후로 시어머님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이들 전학까지 해야 하고, 앞으로의 실거주를 이용한 제 투자 계획까지 모두 무시하는 처사에 강하게 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게 부모에게 좋은 거라고,

아내가 행복해야 남편도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강요에 따르고 숨죽이며 사는 엄마가 과연 가정을 행복하게 이끌 수 있겠냐고 차분히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시어머님과 남편이 만든 답지에 억지로 맞추는 건 나에게는 오답이라고,

내 삶이라는 시험을 망치게 하지 마시자고 그때 용기를 냈어야 했습니다.


그간 이룬 재산을 거의 다 날린 지금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버는 돈만큼입니다.


지금 보면 이보다 더 똥 같은 소리가 어디에 있나 싶어요.


"그럼 강사님의 한평생은 일론 머스크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보다도 쓸모가 없네요."라고 일갈해 주었어야 했는데.


먼저 부동산 투자 좀 해 보고, 돈 좀 벌었다고 자신의 길이 모두 맞다며 강의를 하는 사람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랐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그 말들을 걸러 듣지 않고 다 머리에 새기면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말을 듣고 내 근로 소득을 무시했어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조급하게 투자금을 밀어 넣었고요.

수익형 부동산의 가치가 곤두박질치자 '그런 위험도 감수하지 못할 거면서 투자를 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나 자신만 탓했어요.

남이 하는 말이 오답일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말을 잘 듣는 건 상대방에게 편리한 것이지, 내 삶이 좋아지는 요소가 아니었는데.


무엇보다도,

내가 나의 판단을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삶을 묻는 게 아니었는데.



keyword
이전 06화그게 무시가 아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