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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Sep 09. 2024

이번 달엔 널 보지 않으려 해

잊혀지지 않아도 잊혀질 수 있도록

너만 버리려 했더니, 내가 사랑했던 음악들도 버려진다. 너만 버리려 했는데, 내가 사랑하던 취향들이 버려진다. 너만 버리려 한 건데, 내 삶이 조각조각 버려진다. 귀를 막아버릴까, 눈을 가려버릴까. 지나가는 말 한마디, 흘려가는 멜로디 하나에 네가 다 서려 있는데, 난 널 어떻게 보지 않아야 하지.



네가 내 삶에서 사라진 지 이제 거의 세 달이 다 되어 가. 분명 넌 사라졌는데, 왜 나에겐 여전히 이리도 짙게 남아있는지. 다 내가 멍청한 탓이겠지? 제대로 정리할 줄도, 지나간 인연은 훨훨 털어 보내줄 줄도, 그 어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는 주제에 어른이란 명목으로 감히 널 욕심냈어서 그렇겠지. 나도 알아. 다 알아. 넌 이 모든 걸 할 줄 아는 어른이었겠지. 그래서 네가 욕심났던 거였을 거야.


이미 벼랑 끝에 세워진 지 오래된 마음이지만, 이번 달엔 나를 좀 더 몰아세워보려 해. 지금까진 그리움에 허덕여 자꾸만 숨이 턱 끝까지 차는 나를 하루하루 버티도록 하는 데에 온갖 힘을 끌어다 썼다면, 이제는 널 지우는 데에 내 전력을 다할 거야.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겠지만, 조금이라도, 한 귀퉁이라도, 아주 야금야금 조금씩, 그렇게 지워나가 보려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냥, 한 때 참 좋아했고, 참 고마웠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가벼이 회상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가파른 기대를 걸면서 말이야.


아, 어느 것 하나 감당할 그릇이 안 되는 주제에 감히 너를 욕심낸 나에게 주어지는 자책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 네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든 간에 나에게 너는 참 멋있는 사람이었어. 배울 점도 많고, 너의 하루하루를 참 닮고 싶었어. 네가 그랬지, 사람 마음 2주면 정리된다고,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이별도 무뎌졌다고. 그래, 그 모습까지 닮아 보도록 할게. 이런 것까지 배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묵묵히 새기며 배워가 보도록 할게. 좀 가르쳐 주고 가지 그랬어. 어떻게 이별이 담담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지 말이야.


9월, 이제 가을이 와. 가을이 오면 널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닌가 보다. 낙엽을 바스락 즈려밟으며 산책로를 거니는 너는 더 멋있겠구나,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리는 내가 참 가엽다. 날이 추워지면 좀 살만할 거야. 그립다 못해 의미도 정처도 아무것도 없는 마음이 자꾸만 조여지는 느낌을 추위에 숨겨 좀 덜어낼 수 있겠지.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숨을 쉬면 폐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아릴 듯 차가운 공기에 숨 쉬는 게 여실히 느껴져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끊임없이 그리는 이 미련하고 둔한 마음도 쌀쌀해지는 공기에 조금은 트였으면 좋겠다. 이번 겨울엔 너랑 꼭 첫눈을 보고 싶다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어느덧 이룰 수 없는 덧없는 꿈이 되어버렸네. 


아무것도 저버리지 못해서 미안해. 가을엔 널 꼭 잊어 볼게. 네 SNS도, 네 사진도, 네가 담겨 있는 물건들도, 다, 모두 다 보지 않을 거야. 네가 떠오르는 노래들도 듣지 않을게. 네가 떠오르는 일상들도 살지 않을게. 어리석고 멍청한 내가 너를 또 떠올린다면, 내 손으로 내 양 뺨을 내리칠게.


근데, 내가 듣는 노래는 다 너였고, 내가 살아내는 일상 속에 다 네가 보이는데, 그럼 난 가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너만 버리려 했더니, 내가 사랑했던 음악들도 버려진다. 너만 버리려 했는데, 내가 사랑하던 취향들이 버려진다. 너만 버리려 한 건데, 내 삶이 조각조각 버려진다. 귀를 막아버릴까, 눈을 가려버릴까. 지나가는 말 한마디, 흘려가는 멜로디 하나에 네가 다 서려 있는데, 난 널 어떻게 보지 않아야 하지. 


제발,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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