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베트남. 안녕, 사이공
내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언젠가 베트남을 떠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올해 눈 앞에 다가올 줄은 몰랐다. 베트남에 올 때 특별히 계약 기간이나 약속된 거주 기간은 없었기 때문에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지 나 스스로도 매우 궁금했었는데, 놀랍게도 나의 다음 목적지는 한국 서울이 아니라 영국 런던 근교가 되었다.
이전에 말했듯 남편은 글로벌 회사의 베트남 법인에서 생리대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이직을 해볼까 고려하던 중에 지금 다니는 회사의 유럽 오피스에 자리가 생겨서 면접을 봤고 그렇게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생리대 레전드 되어가는 중) 다만 전 세계인이 알다시피 지금은 팬데믹 상황이라 바로 이사는 어렵고 일단 올해 말까지는 베트남에서 원격 근무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지금 둘이 동시에 재택 & 원격근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4월 락다운 때도 둘 다 집에서 일했지만 차이가 있다면 남편에게 시차가 생겼다는 점. 그래서 예전과 다르게 오전 + 점심시간을 같이 쓰고 그 후에는 각자 일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영국. 한국에서 영국 가는 것보다 어쩌면 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결정이다. 언어, 기후, 물가, 인종, 음식, 교민사회, 하물며 도로 방향까지 베트남과 영국 생활은 그나마 비슷한 걸 찾는 게 빠를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
나는 영국에 가 본 거라곤 2009년에 노르웨이에서 교환학생 할 때 꽉 찬 2박 3일로 하루 만 보 넘게 걸으며 런던 여행 다녀온 게 전부고, 남편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아 시절 잠시 맨체스터에 산 적 있었다는 것뿐. 베트남에 올 때는 '한 번 다녀오고 결정하자'며 휘리릭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이 코로나 시국에 국경을 넘는 건 (특히 베트남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유튜브나 구글에서 얻은 정보, 그리고 우리 눈 앞에 주어진 데이터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가능하면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이 시국에 한국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무작정 가서 내가 일하고 남편은 거기서 일자리를 찾아볼까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그건 현실 가능성이 너무 낮았고, 그나마 이야기가 되어가던 한국의 다른 직장 오퍼는 relocation 제외하고 일자리 자체만 놓고 봤는데도 한참 비교가 될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한국으로 가는 옵션은 연봉이나 업무 강도, 커리어 모두 영국이 아니라 베트남하고 비교해도 해외 이사를 감행할 만큼 강점이 없었다. 나도 한국에 가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지 코로나 까지 겹쳐서 100%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할 선택을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몇 개월을 머리 싸매고 고민한 끝에 영국행을 결심했고, 우리는 이렇게 베트남과의 이별을 천천히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 19 이후 주변 사람들이 베트남을 갑작스럽게 떠나는 경우가 많아서였는지 우리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은 느낌이다.
지난 2년을 (떠날 시점까지 짧게는 4개월 더 남았지만) 돌이켜보니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이었다. 베트남 생활을 떠올리면....
베트남에서 내가 얻은 것
운동 재미
몸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는데 여기 와서 재미 붙였다. 요즘은 웨이트 하는 중!
회사 말고 내 미래에 대한 고민
영국행을 결정하기 전부터 해외 생활이 길어지면서 한국 회사원으로서의 복귀는 멀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프리랜서, 아니면 뭐든 돈벌이를 할 수 있을 내 미래를 생각하게 됐다. 사실 지금 준비하는 것도 있는데 아직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는 수준이라 완성되면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오토바이 운전 능력
베트남하면 역시 오토바이를 빼놓을 수 없지. 기동력 생긴 덕분에 훨씬 편하게 다양한 곳을 다녀볼 수 있었다.
매뉴얼보다는 실전
원래도 나는 매뉴얼보다 실전파이긴한데 (경험에서 얻은 데이터를 정리하는 걸 좋아함) 호치민처럼 다이내믹한 도시에서는 정말 실전 경험만큼 중요한 게 없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움직이는 걸로.
요알못에서 집밥 앨선생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요리하고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코로나 영향도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잘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한 번에 2-3가지 요리는 기본으로 함. 영국행이 두렵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나의 홈쿡 스킬 덕분이다.
(이 와중에 언어능력이 없다는 게 슬프지만...)
베트남에서 내가 버린 것
완벽에 대한 강박
외국 살아보니 한국만큼 좋은 곳 없다지만 잘해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 정확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베트남 살면서 좌충우돌하다 보니 이제 기본 마인드는 '그럴 수도 있지 뭐'. 물론 가끔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마인드 컨트롤이 안 될 때가 있긴 함.
플랜 A에 대한 집착
위 항목과 비슷한 것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빠른 포기'다. 일단 해보고 안될 것 같으면 빨리 대안을 찾는 편. 붙들고 있다가 해결은 안 되고 시간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피부, 머릿결
강한 직사광선 때문인지... 피부 상태와 머릿결은 돌아오지 않음.
(이 외에도 버린 건 많은 거 같은데 기억이...)
본격 이사 준비는 떠날 날이 정해져야 할테니 그 때 업데이트 하는 걸로. 나름 해외이사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번 만큼 겁나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영국 가기 전에 한국 들러야하는데 올해 안에 자가격리 방침은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고... 내 인생에 최소 1달은 오며가며 격리 생활로 쓰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