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영국으로 이삿짐을 보냈다

더 이상의 이사는 그만하고 싶다

by 앨리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지난달, 나는 2년 3개월 정도 살았던 집의 모든 짐을 다 영국으로 보냈다. (아직 베트남에서 출발은 안 했겠지만 일단 컨테이너에 담겨있음...) 해외이사 경력(?)도 있겠다, 자신만만하게 덤볐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리 간단해도 이사는 쉬운 게 아니었고, 특히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짐을 보내는 건 어나더 레벨.




일단 이사 시작 전부터 불안했다. 우리가 이사하기로 한 날은 목요일이었는데 갑자기 화요일에 전화 와서 하루 만에 다 못 할 것 같다며(?) 수요일부터 가도 되냐고 하는 것. 그걸 왜 지금 얘기해...? 그리고 사람 둘에 고양이 한 마리 사는 집이 짐이 많아봤자인데 하루 만에 못 끝낸다니...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한국인이라서였다.


한국은 워낙 이사 전문가들이 많아서 아무리 짐이 많아도 오전에 짐 싸고 + 세입자들은 점심시간 후에 보증금 받아서 전세금 새 집에 입금하고 + 오후에 이사 업체에서 짐 풀고 이 모든 걸 하루에 다 하는데 말이지. 결국 난 무려 이틀에 걸쳐서 짐을 싸야 했다.


이사 D-Day (수요일)

이 날 아침부터 혼돈의 카오스였다. 나는 노옵션(unfurnished) 집에 살고 있어서 모든 대형 가전을 다 팔고 가야 하는데 아침에 건조기 구매자가 오기로 했던 것. 시간은 잘 맞춰 왔는데 엄청 큰 건조기를 사러 오겠다는 사람이 혼자 온 거다. (황당)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면서 처리해주고, (베트남은 큰 물건 나갈 때마다 반출증을 꼭 써야 함) 건조기를 내보내고 나니 내가 예상한 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젠장.


IMG_3917.jpg
IMG_3915.jpg
왼쪽: 도주하는 것 아님, 3개국을 거칠 우리의 임시 짐 / 오른쪽: 영문 모른채 집에서 마지막 식사하는 도미

그래도 계획대로 미리 싸 둔 짐을 임시 숙소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그 임시 숙소는 우리가 호치민 정착 초기 이사 대란 겪을 때 갔던 그곳이다. 고양이를 받아 주는 숙소가 많지 않으니 맘 편히 지인 찬스로 머무르기로.


IMG_3926.jpg
IMG_3923.jpg
자 패킹을 시작해볼까


약속한 시간에 이사 업체 매니저가 왔고, 오자마자 집 안에 있는 모든 전자기기 모델명과 이름을 적길래 이건 뭐냐고 했더니 베트남에서 나갈 때 필요한 서류라고 했다. 여기 물건을 내다 파는 게 아니고 이건 우리가 쓰던 물건이다 뭐 이런 내용.


그다음에는 직원들이 우르르 오더니 본격적으로 패킹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갑자기 본격적으로?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박스 맞추고 그릇을 꺼내 싸길래 난 얼른 고양이를 케이지에 넣고 다시 숙소로 갈 준비를 했지만 조나단에게 급히 처리할 회사 일이 생겨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됐다. 남편은 이삿짐 더미 속에서 일하고,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고, 박스 테이프 소리와 박스 부딪히는 소리가 시끌시끌한 가운데 내 멘탈은 잠시 로그아웃.


조나단이 급한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이삿짐 싸는 집을 맡기고 나는 고양이와 함께 임시 숙소로 출동.


IMG_3936.jpg
IMG_3942.jpg
어디가 집사!

우리 고양이 무게가 상당히 나가는 탓에 케이지까지 하면 10kg. 거기에 기내용 캐리어 하나까지 들고 가려니 정말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래도 도어 투 도어로 움직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찌저찌 우리가 묵을 방에 고양이를 넣어놓은 순간 낯선 곳이라 고양이는 난리가 났다. 침대 밑으로 숨고 스탠딩 거울 위에 올라타고 울고 불고...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앉아 고양이를 위로해 줄 시간이 없었다. 집에 있는 남편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 것. 컨테이너에 실으려고 일부러 한국에서 구매해서 해상택배로 받은 고양이 사료와 베트남 이마트까지 가서 구매한 식재료(육수 팩, 각종 양념 등)를 실을 수 없다고.


뭐라고! 컨테이너 이사 최대 장점이 집 안에 먼지까지 가져갈 수 있는 거 아니었냐며.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다녀올 수도 없으니 최대한 베트남에서 실을 수 있게 준비를 한 거였는데, 아무것도 못 가져가게 생겼으니 정말 허탈했다. 당연히 남편은 화가 나서 에이전시에 이걸 미리 얘기해줬냐, 그걸 짐 싸면서 얘기하면 어떡하냐 따져봐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사 전에 보낸 수십 개의 첨부파일 중 하나에 아주 짤막하게 써져 있었기 때문. 순식간에 우리는 첨부파일 제대로 안 본 모지리가 되어버렸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었으면 한 번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또 한국인이라서 그렇다고 지인 분이 이야기해 주셨다. (....) 기대를 말아야지...


IMG_3945.jpg
IMG_3948.jpg
함께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이전시에 육가공품이랑 유제품만 아니면 되냐, 나머지는 되냐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해 봤지만 일단 이사 컨테이너에 식료품이 들어간 순간 담당 직원이 따로 붙고, 통관이 오래 걸릴 거라서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험을 해볼까 했지만 이미 진이 다 빠져서 우리는 사람 혹은 고양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걸 다 걷어내기 시작했다.


영국 입국할 때 핸드캐리 하면 되지 않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찾아보니 육가공품 반입은 원칙적으로는 안됨.

https://www.gov.uk/guidance/personal-food-plant-and-animal-product-imports#non-EU


베트남에도 이런 규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있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 모르겠지만 해외에서 해외로 이사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예전에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짐 보낼 때는 짐 싸주는 분들이 '한국인들이 많이 챙겨가는 것 중에 가져가면 안 되는 것', '이 정도는 용인되는 것' 정도를 잘 얘기해주셨는데 베트남 사람들이 내 기준에 맞춰서 말해줄 리 만무하고 원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겠지.


결론적으로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우리가 들고 한국에 와서 잘 먹고 있고(?) 고양이 사료 잔뜩 산 건 페북에 올려서 보호소 한다는 분한테 엄청 싸게 넘겼다. 야옹이들아 행복하렴.


IMG_3957.PNG 다시 공부를 해봅니다


이 날 저녁에도 중고거래가 있었는데 세탁기, 식탁, 냉장고를 한 번에 사간다는 사람이 동행 없이 혼자 + 큰 트럭도 아니고 일반 픽업트럭 하나 가져와서 왔다 갔다 하는 통에 우리는 거의 밤 9시가 돼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사 D+1 (목요일)


IMG_3967.jpg 쌀국수로 전투의지 불태우는 중

나머지 이삿짐을 싸고 집을 거의 비우는 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근처 쌀국수집에서 호로록 한 그릇하고 바로 이사의 현장(?)으로 향했다.


IMG_3973.jpg
IMG_3969.jpg
아아메 없이는 버틸 수 없음

전날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아수라장. 사실 이제는 쫓아다니면서 체크하는 것보다는 싸야 되는데 안 싼 게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다 했다고 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러그나 화장실 슬리퍼 같은 것들을 챙기는 것.


IMG_3979.jpg
IMG_3980.jpg
이사 끝!

맨 마지막에 나가야 할 가구 빼고는 모든 짐이 다 빠졌고 거대한 박스들도 모두 지하 주차장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컨테이너 실링 하는 걸 보여주지 않았는데 박스 개수는 총 104개. 한국에서 베트남 올 때 120개 정도였던 거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그때도 컨테이너가 비었지만 이번에는 더 텅텅 비었을 듯. 그 공간이 너무 아깝지만 채울 수 없으니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로.


IMG_3982.jpg 고마웠어 우리 집!

호치민에 오자마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사를 몇 번 하고 나서 고른 이번 집. 그래서인지 더 애착이 갔고, 별 간섭 없는 쿨한 집주인 덕분에 문제없이 2년 3개월이나 잘 살았다. 지금도 우리는 호치민 생활에서 가장 그리운 건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라고 할 정도로 집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2020년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었는데도 힘들지 않았던 건 좋은 집 덕분이었던 듯.


이제 우리 가족의 임시 집 생활이 시작됐다. 호치민에서 10일, 한국에서 1달, 영국에서 1달 혹은 그 이상.


영국에 가서도 우리에게 잘 맞는 집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