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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Jan 04. 2021

베트남에서 영국으로 이삿짐을 보냈다

더 이상의 이사는 그만하고 싶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지난달, 나는 2년 3개월 정도 살았던 집의 모든 짐을 다 영국으로 보냈다. (아직 베트남에서 출발은 안 했겠지만 일단 컨테이너에 담겨있음...) 해외이사 경력(?)도 있겠다, 자신만만하게 덤볐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리 간단해도 이사는 쉬운 게 아니었고, 특히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짐을 보내는 건 어나더 레벨. 




일단 이사 시작 전부터 불안했다. 우리가 이사하기로 한 날은 목요일이었는데 갑자기 화요일에 전화 와서 하루 만에 다 못 할 것 같다며(?) 수요일부터 가도 되냐고 하는 것. 그걸 왜 지금 얘기해...? 그리고 사람 둘에 고양이 한 마리 사는 집이 짐이 많아봤자인데 하루 만에 못 끝낸다니...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한국인이라서였다. 


한국은 워낙 이사 전문가들이 많아서 아무리 짐이 많아도 오전에 짐 싸고 + 세입자들은 점심시간 후에 보증금 받아서 전세금 새 집에 입금하고 + 오후에 이사 업체에서 짐 풀고 이 모든 걸 하루에 다 하는데 말이지. 결국 난 무려 이틀에 걸쳐서 짐을 싸야 했다. 


이사 D-Day (수요일) 

이 날 아침부터 혼돈의 카오스였다. 나는 노옵션(unfurnished) 집에 살고 있어서 모든 대형 가전을 다 팔고 가야 하는데 아침에 건조기 구매자가 오기로 했던 것. 시간은 잘 맞춰 왔는데 엄청 큰 건조기를 사러 오겠다는 사람이 혼자 온 거다. (황당)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면서 처리해주고, (베트남은 큰 물건 나갈 때마다 반출증을 꼭 써야 함) 건조기를 내보내고 나니 내가 예상한 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젠장.


왼쪽: 도주하는 것 아님, 3개국을 거칠 우리의 임시 짐 / 오른쪽: 영문 모른채 집에서 마지막 식사하는 도미

그래도 계획대로 미리 싸 둔 짐을 임시 숙소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그 임시 숙소는 우리가 호치민 정착 초기 이사 대란 겪을 때 갔던 그곳이다. 고양이를 받아 주는 숙소가 많지 않으니 맘 편히 지인 찬스로 머무르기로. 


자 패킹을 시작해볼까


약속한 시간에 이사 업체 매니저가 왔고, 오자마자 집 안에 있는 모든 전자기기 모델명과 이름을 적길래 이건 뭐냐고 했더니 베트남에서 나갈 때 필요한 서류라고 했다. 여기 물건을 내다 파는 게 아니고 이건 우리가 쓰던 물건이다 뭐 이런 내용. 


그다음에는 직원들이 우르르 오더니 본격적으로 패킹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갑자기 본격적으로?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박스 맞추고 그릇을 꺼내 싸길래 난 얼른 고양이를 케이지에 넣고 다시 숙소로 갈 준비를 했지만 조나단에게 급히 처리할 회사 일이 생겨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됐다. 남편은 이삿짐 더미 속에서 일하고,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고, 박스 테이프 소리와 박스 부딪히는 소리가 시끌시끌한 가운데 내 멘탈은 잠시 로그아웃. 


조나단이 급한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이삿짐 싸는 집을 맡기고 나는 고양이와 함께 임시 숙소로 출동. 


어디가 집사!

우리 고양이 무게가 상당히 나가는 탓에 케이지까지 하면 10kg. 거기에 기내용 캐리어 하나까지 들고 가려니 정말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래도 도어 투 도어로 움직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찌저찌 우리가 묵을 방에 고양이를 넣어놓은 순간 낯선 곳이라 고양이는 난리가 났다. 침대 밑으로 숨고 스탠딩 거울 위에 올라타고 울고 불고...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앉아 고양이를 위로해 줄 시간이 없었다. 집에 있는 남편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 것. 컨테이너에 실으려고 일부러 한국에서 구매해서 해상택배로 받은 고양이 사료와 베트남 이마트까지 가서 구매한 식재료(육수 팩, 각종 양념 등)를 실을 수 없다고.


뭐라고! 컨테이너 이사 최대 장점이 집 안에 먼지까지 가져갈 수 있는 거 아니었냐며.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다녀올 수도 없으니 최대한 베트남에서 실을 수 있게 준비를 한 거였는데, 아무것도 못 가져가게 생겼으니 정말 허탈했다. 당연히 남편은 화가 나서 에이전시에 이걸 미리 얘기해줬냐, 그걸 짐 싸면서 얘기하면 어떡하냐 따져봐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사 전에 보낸 수십 개의 첨부파일 중 하나에 아주 짤막하게 써져 있었기 때문. 순식간에 우리는 첨부파일 제대로 안 본 모지리가 되어버렸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었으면 한 번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또 한국인이라서 그렇다고 지인 분이 이야기해 주셨다. (....) 기대를 말아야지... 


함께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이전시에 육가공품이랑 유제품만 아니면 되냐, 나머지는 되냐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해 봤지만 일단 이사 컨테이너에 식료품이 들어간 순간 담당 직원이 따로 붙고, 통관이 오래 걸릴 거라서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험을 해볼까 했지만 이미 진이 다 빠져서 우리는 사람 혹은 고양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걸 다 걷어내기 시작했다.


영국 입국할 때 핸드캐리 하면 되지 않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찾아보니 육가공품 반입은 원칙적으로는 안됨. 

https://www.gov.uk/guidance/personal-food-plant-and-animal-product-imports#non-EU


베트남에도 이런 규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있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 모르겠지만 해외에서 해외로 이사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예전에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짐 보낼 때는 짐 싸주는 분들이 '한국인들이 많이 챙겨가는 것 중에 가져가면 안 되는 것', '이 정도는 용인되는 것' 정도를 잘 얘기해주셨는데 베트남 사람들이 내 기준에 맞춰서 말해줄 리 만무하고 원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겠지. 


결론적으로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우리가 들고 한국에 와서 잘 먹고 있고(?) 고양이 사료 잔뜩 산 건 페북에 올려서 보호소 한다는 분한테 엄청 싸게 넘겼다. 야옹이들아 행복하렴.


다시 공부를 해봅니다


이 날 저녁에도 중고거래가 있었는데 세탁기, 식탁, 냉장고를 한 번에 사간다는 사람이 동행 없이 혼자 + 큰 트럭도 아니고 일반 픽업트럭 하나 가져와서 왔다 갔다 하는 통에 우리는 거의 밤 9시가 돼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사 D+1 (목요일)


쌀국수로 전투의지 불태우는 중

나머지 이삿짐을 싸고 집을 거의 비우는 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근처 쌀국수집에서 호로록 한 그릇하고 바로 이사의 현장(?)으로 향했다. 


아아메 없이는 버틸 수 없음

전날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아수라장. 사실 이제는 쫓아다니면서 체크하는 것보다는 싸야 되는데 안 싼 게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다 했다고 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러그나 화장실 슬리퍼 같은 것들을 챙기는 것. 


이사 끝!

맨 마지막에 나가야 할 가구 빼고는 모든 짐이 다 빠졌고 거대한 박스들도 모두 지하 주차장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컨테이너 실링 하는 걸 보여주지 않았는데 박스 개수는 총 104개. 한국에서 베트남 올 때 120개 정도였던 거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그때도 컨테이너가 비었지만 이번에는 더 텅텅 비었을 듯. 그 공간이 너무 아깝지만 채울 수 없으니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로. 


고마웠어 우리 집!

호치민에 오자마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사를 몇 번 하고 나서 고른 이번 집. 그래서인지 더 애착이 갔고, 별 간섭 없는 쿨한 집주인 덕분에 문제없이 2년 3개월이나 잘 살았다. 지금도 우리는 호치민 생활에서 가장 그리운 건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라고 할 정도로 집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2020년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었는데도 힘들지 않았던 건 좋은 집 덕분이었던 듯. 


이제 우리 가족의 임시 집 생활이 시작됐다. 호치민에서 10일, 한국에서 1달, 영국에서 1달 혹은 그 이상. 


영국에 가서도 우리에게 잘 맞는 집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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