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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Sep 11. 2018

나의 인생을 뒤집어 놓은 72시간

호치민이라는 도시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문제의 그 사태가 발생한 지 이제 만으로 일주일이 됐다. 이제야 나의 정신을 가다듬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글로 남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30년 살면서 이런 역경은 살면서 처음이고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면 바닥을 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첫째 날: 이사 나가던 날

원래 내가 고른 집은 호치민에서 손꼽힐 만큼 유명한 아파트 단지였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엄청난 대단지였고, 호치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랜드마크 81이 들어서 더욱 각광받았다. 사이공 강 앞에 호치민에서 보기 드문 녹지 공원이 펼쳐져있고,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 하늘을 찌를 듯한 랜드마크81이 오묘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내가 살았던 집이 저 랜드마크81 바로 뒷 편에 있다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나는 한눈에 반한 것처럼 바로 계약하겠다고 했고, 이사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우리가 입주한 지 20일쯤 됐을까. 집주인이 집을 팔았다며 우리는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이 되는 소리냐, 이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가라니. 우리 부부는 처음에는 절망했다가, 나름의 행복 회로를 돌리며 보상금 번 걸로 여행이나 가자고 다시 이사 갈 곳을 알아봤다. 



0시간 ~ 12시간

대망의 이사 당일, 아침부터 짐을 빼고 보증금을 돌려받는 자리에서 첫 문제가 터졌다. 원래 노옵션 집이었는데 이사를 나가면서 생긴 자잘한 먼지들을 걸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청소비를 받아야겠다고. 안 그래도 집에서 쫓겨나는 마당에 제정신일 리 없는 우리가 바로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청소가 완벽하지 않아서 우리 돈 들여서 다시 청소를 했고, 지금 한 달 살다 나가면서 청소가 왜 우리 몫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들어올 사람을 위해서 당신이 청소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했지만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집에 입주하면서 1년짜리 인터넷을 신청했는데 이사 갈 곳에는 그 회사의 케이블이 들어오지 않아 인터넷을 옮길 수 없고, 집주인에게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상태였다. 텅 빈 집에서 지루한 협상이 계속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시간이 가장 아까웠다. 나는 돈도 돈이었지만 쫓겨나가는 입장에서 우리를 끝까지 벗겨먹으려는 집주인에게 너무 화가 났고 한치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완벽하게 이길 수 없었다. 


새로운 집에 이사할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그곳으로 향했고 남편은 혼자 남아 협상을 했는데, 결국 우리가 받아야 할 4달 치 월세 (원래 받을 보증금 2달 치에 보상금 2달 치) 중에서 원래 냈어야 할 3일 치 렌트비와 청소비를 일부 제한 것, 그리고 인터넷 비용을 돌려받았다. 


12시간 ~ 24시간

문제는 새로 이사 올 집에서도 시작됐다. 내가 먼저 와 보니 청소가 돼 있어야 할 집이 그냥 잠겨있는 것이다. 부동산에 얘기했더니 집주인이 청소부를 오후에 불렀다는 것이다. 내가 분명 이사는 오후 1시부터 시작한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이사업체는 청소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고, 별 수 없이 제대로 청소되지 않은 집에 집기를 집어넣은 다음 나중에 청소를 하기로 했다. 


어수선하게 물건을 채워 넣는 사이 원래 모든 방에 해 주기로 했던 방충망도 해 달라고 하고, 인터넷도 신청했다. 그 전 집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잊고 다시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하자는 마음에서. 정리가 100% 된 건 아니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는 사람을 따로 부르면 집이 마법을 부린 것처럼 깨끗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수선하게 정리하던 날, 이 때만 해도 기대에 차 있었다


문제는 자려고 누웠을 때 또 터졌다.


우리가 아침부터 움직여서 엄청나게 피곤한데도 잠이 하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게 커피를 마셔서 그런 건지, 피곤해서 더 잠이 안 오는 건지 구분이 안 가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서로를 다독이며 귀에 이어폰을 꽂아보자, 다음에 운동하면 잠이 올 거라는 얘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트럭 소리, 그 트럭이 내는 경적 소리, 트럭이 지나가면서 창문이 흔들리는 것까지... 정말 인생 최악의 밤을 보냈다.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속이 울렁거렸고 내가 한국에서 비상으로 받아 온 안정제를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둘째 날: 다시 이사를 결정하다. 
24시간 ~ 36시간

2시간도 자지 못한 채로 새벽 6시에 우리가 내린 결정은 다시 이사를 가자는 거였다. 사실 이 결정을 내리는 게 처음에는 망설여졌지만 한숨도 못 잔 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시 이사를 가자고 했다. 당연히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겠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이 살 수가 없는 환경에서 돈을 아끼겠다고 미련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 8시가 되자마자 부동산에 연락을 해서 당장 오라고 했고, 이 상황을 얘기했다. 이사 온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계약을 파기했고, 보증금 1달 치만 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입주자를 받고 싶으면 창문에 시공을 하는 게 좋겠다고까지 얘기했다. 우리가 빠른 결정을 내린 덕분에 집주인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우리는 다시 이사를 알아봐야 하는 처지가 됐다. 


36시간 ~ 48시간

이렇게 된 이상 그 집에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호텔을 갈까도 생각했지만 우리에게는 고양이 도미가 있었다. 잠을 한숨도 못 자서 도저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수준이니 일단 그 날까지만 친구에게 하루만 더 고양이를 맡아달라고 했고, 그 날은 남편의 팀장님 집에서 하루 자기로 했다. 우리의 사정을 듣고 빈 방을 하루 내어주시기로 한 거다. 이 아파트는 고속도로도 없는 외진 곳이니 어떤 느낌일까 체험도 해 볼 겸.... 


그 집에 도착했더니 팀장님 가족 분들께서 저녁도 챙겨주시고, 정말 가족처럼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 순간 식탁에서 울컥했지만, 안 그래도 민폐인데 더 민폐가 될까 봐 꾹 참았다. 좋은 분들의 배려로 우리는 꼬박 이틀 만에 깨지 않고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셋째 날: 도미와 함께 숙소를 옮기다 
48시간 ~ 60시간

이제 다시 우리는 고양이 도미와 함께 있을 곳을 찾았다. 팀장님 집에서 나와 친구 집에 들러서 도미를 픽업하고 새로운 숙소로 옮기는 계획이다. 남편 선배가 시내에서 에어비앤비 사업을 하는데, 다행히 우리와 고양이를 위해 방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좀 걱정했는데 가보니 조그만 부엌까지 있는 큰 방에 오히려 아파트 단지보다 조용한 방이었다. 거기에 엄청 큰 킹 사이즈의 침대까지! 


집사 왜 이제야 왔냐옹

부드러운 침구에 고양이 도미까지 같이 있으니 점차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우리 가족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60시간 ~ 72시간 

처음에는 이 숙소에 다음 집 찾을 때까지 쭉 있으려고 했지만 나는 또 겁이 덜컥 났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난 여기서 혼자 무엇을 해야 하나, 안 그래도 이 도시가 익숙하지 않은데 또 익숙하지 않은 곳에 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한동안 잠잠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불안함이 나를 찾았고, 남편에게 익숙한 아파트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처음 골랐던 단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긴 대화를 나눈 끝에, 마인드를 바꿔서 '우리가 살 만한 집에 살아보자'는 모토로 우리가 마음에 담아 둔 곳들을 에어비앤비로 며칠 씩 지내보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짧게는 1년 아니 어쩌면 더 길지도 모르는 시간을 위해 이 정도 투자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72시간, 그 후

우리는 지금 또 다른 대단지 아파트에서 에어비앤비로 지내고 있다. 다행히 호스트와 이야기가 잘 돼서 고양이와 함께 투숙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한 공간에서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이제야 일주일이 지났다니. 내가 살면서 가장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우리 부부는 '맘에 들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는다'와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다이내믹하게 발전하는 이 도시에 조용함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 정도는 내려놓기로 했다는 뜻이다. 


과연, 우리 부부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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