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가사노동에 최소한으로 임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많은 일'이라고 쓰기에도 부족한 수준으로 엄청난 일들이 우리 부부에게 일어났고 모든 게 서투른 우리는 맥없이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글자 그대로 '울고 싶은 순간들'이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어떻게 잘 지나갔다. 여하튼, 지난 3일 간 있었던 일은 나중에 좀 정리를 해보기로 하고 그 일로 인해 우리 부부에게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리는 바이다.
내가 호치민에 온 지 이제 두 달이 안 되었지만 여기 오기 전 나의 마음가짐은 '회사를 그만두고 일단 가사에 집중한다'는 거였다. (내가 이전에 쓴 홈메이커 글을 보면 그때의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전 집에서는 어떻게 보면 그런 삶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아침에 남편 출근할 때 간단히 먹을 것 좀 챙겨주고, 남편 회사 간 사이에 나는 베트남어 과외를 받거나 장을 보고, 집 정리하고 고양이 도미를 돌봤다.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밥을 차려주고 (만들어주는 것 아님) 같이 빈둥거리다가 잠드는 날들. 주말에는 평소처럼 데이트를 했지만 평일의 삶이 내게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때는 그게 '내가 해 보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아시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게 정답인 것처럼 보였다. 남편이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을 하니까, 그 사이 나는 집안일을 서포트해줘야지. 내가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으니까 어느 정도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더 정리되면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봐야지, 하는 생각.
하지만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야만 했고,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했지만 그 집에서는 시끄러워서 잠을 한 숨도 못 잔 채 하루도 안 돼서 다시 이사를 결정했다.
이게 우리의 잘못인가, 처음에는 자책을 했지만 이제 자책하지 않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내가 비상용으로 가져온 안정제를 자기 전 하나씩 먹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호치민에 오기 전에 했어야 할 대화를 이제야 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외 생활에 임할 것인지, 우리는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걱정하는 건 무엇인지 등등.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남편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분명 우리는 한국에서 맞벌이를 하고 각자 가사노동을 나눠서 했는데, 여기에 와서 본인만 회사에 나간다는 이유로 내가 가사노동을 다 하는 게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했다고. 본인이 보기에도 내가 의무감에 가사노동을 하는 게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회사 다니느라 정신없었고 자기 자신도 이런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는 걸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려고 새 집을 볼 때 집에 식기세척기나 빨래건조기가 있는지 살펴봤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그런 기기가 없는 이유는 기계+전기값이 인건비보다 훨씬 더 비싸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뭐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자, 집안일 빼고
어떻게 보면 돈 벌러 여기에 온 건 맞지만 해외 생활을 하는 메리트를 충분히 누리자고 했다. 처음에는 외벌이 가족이 되면서 '돈을 아껴야 한다'는 것과 물가가 싼 나라에 왔으니 '돈을 많이 벌어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는 일부러 돈을 들여서 해외생활 경험을 쌓으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래도 수입이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집에 고스란히 묶여있을 전세 보증금과 4년 간 회사생활하면서 쌓은 나의 퇴직금이 지금 내 은행 계좌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들어있었다.
이 나라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말하면 좀 슬프기도 하지만) 인건비를 포함한 물가가 싸다는 것이다. 돈을 아끼려면 집안일을 직접 하고 로컬 시장에 가서 장을 봐도 되지만 굳이 안 그래도 된다는 뜻이다. 월세도 물론 큰돈이지만 한 달에 50~100불 아끼려다 우리처럼 오히려 더 큰 낭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앞으로는 집안일을 메이드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이도 없고 우리 부부와 고양이 한 마리만 있는 집이니 하루에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 사이 나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을 채워나가기로 했다. 내 남편은 또 호치민에 있는 나를 보며 본인보다 내가 일 자체를 더 좋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하긴, 여기 와서 가장 즐거울 때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신기한 서비스들 써보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들이었다. 이런 것들로 돈을 벌면 가장 좋고, 그게 아니라면 나 혼자 셀프 프로젝트를 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이 곳에서의 삶을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
우연인지, 남편이 일하는 회사 건물에 WeWork이 곧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면 아침에 같은 건물로 출근해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킹하다가 남편하고 같이 퇴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수요일부터 너무나 힘든 날을 보냈지만, 이게 우리 부부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호치민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마인드 셋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다시 이 도시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