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부커 Aug 16. 2024

그래요. 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입니다.

여름방학 턱수염과 동행

출근 전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면도를 한다.

근데 며칠 전 갑자기 why?  떠올랐다.

도대체 왜 나는 면도를 매일 해야 하는가?


43살이나 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다쳐가면서까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를 못했다.


미관상, 위생 상 타인을 위해서?

그냥 매너라고 배웠기 때문에?

아님 안 깎으면 건강상 문제라도 당장 생기는가?


바쁠 때 면도를 하다 보면 곳곳에 상처가 난다.

언제 칼날에 비었는지도 모르게

하얀 비누 거품 속에서 빨간 피가 나기도 한다.


하루 종일 따끔거리며 아프다.

작은 반창고를 붙이고 다녀도 사람들은

나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한순간 칠칠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말하기도 변명하기도 애매하다.


다시 묻는다.

나는, 아니 우리는 왜 얼굴 면도를 매일 같이 해야 하는가?


그럼 겨드랑이 등 다른 곳에 자라나는 털들은?

why 매일 깎지 않는가?

단지 사람들이 보지 못해서?? 


반드시 해야만 한다.라고 스스로 납득이 안된다.

그렇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을 전환해 본다.

앞으로 당분간 수염과 함께 가기로 한다.


수염은 자라는 것이 본성이다.

나는 한 번도 수염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지도

배려해 본 적도 없다. 


학생, 교직원과 접촉이 적은 여름방학만이라도

수염을 마음껏 방치? 하며 몸에 들어간 힘을 빼본다.


그동안 하루도 참지 못하고 바싹 날을 세워

수염을 깎아내던 나의 마음에 여유 한 스푼 넣어준다.


나 자신보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

무엇이든 반드시 해야만 한다. 

A+B=C 가 되어야만 한다.라는

고정화된 패턴식 의사결정 구조를 버리고

유연성을 가지고 편하게 받아들여 본다.


별거 아닌 수염 덕분에 많은 셀프 인사이트를 얻는다.

살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발가락, 등, 어깨, 다리,

손등, 허벅지, 뒤통수 등에도 수십 년 만에 말을 걸어 본다.


신체부위 곳곳에 감사인사도 전해본다.

그동안 관리자로서 많이 무심했지?

여러모로 나를 위해 긴 시간 견뎌줘서 정말 고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맡은 바 역할을 잘해주었기에 

 '지금의 나'가 완성되어 있는 거 아니겠니?


수염은 수염이 아니다.

수염은 나의 성찰 거울이다.

메타인지의 나침반이다.


여름방학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염과의 동행, 아쉽지만 곧 작별해야 한다.


수염은 그렇게

 내 안의 따뜻함과 유연함을 확인시켜 주고

낮달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고마운 존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요. 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