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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슬머리 Oct 11. 2024

13. 만약에, (3)

*

“임신 6주 차네요.”


나무는 자신에게 온 신체 변화를 나이가 만들고 있는 흔적이라고 여기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병원을 간 거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무는 멍하게 앉아 있었다.


“선생님, 제 나이가 곧 마흔 후반이고요.. 그리고..”


나무의 혼란스러움을 나이 탓으로만 여긴 의사 선생님은 웃으며, 축복이라며 축하를 전했다.


“지금 나이에 아이를 가지신 분들 보면, 다들 건강하게 순산하셨어요. 걱정 마세요.”


나무는 그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을 잡고 인생의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고, 어떤 말도 더 이상 전할 여유가 없던 나무는 심란해하며 진료실을 나왔다.


젊은 임산부들이 보였고, 남편들과 함께 자신의 진료를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 나무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젊지 않았고, 남편도 없었다. 그렇게 바라던 아이는 이렇게 예측 못한 상황에 자신에게 왔다. 아이를 바랐던 자신을 떠올렸지만, 지금 아이를 반길 수만 없는 현실이 너무도 기가 막혀 한참을 이동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인지,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는, 아니 관여하지 않았던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나무는 무서웠다. 지금 이 나이에, 혼자인 자신에게 온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있는지 수도 없이 묻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용기를 잃고 있었다. 자신이 감당할 세상의 손가락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 든 엄마, 없는 아빠를 받아들일 아이가 걱정이 되어 나무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와 살아갈 인생이 막막했고, 아이가 알게 될 세상이 두려웠고.. 아이의 세상에 아무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혼자가 된 자신임을 나무는 제대로 깨닫고 있었다.


**

나무는 눈을 떴다. 너무도 괴롭고 끔찍한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느껴진 막막함은 꿈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난하게 했다. 한없이 바보 같았던, 매 순간 바보 같은 선택을 한 자신을 끝도 없이 탓했던 나무는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안심을 하며 지금 이 순간의 이 현실에 감사했다.


나무는 효인이와 지난주에 헤어졌다. 1년 안되게 사귀고 헤어졌다. 늘 나무의 모든 걸 축소시켰던 효인이었다. 나무를 위한 자신의 사소한 배려를 크게 포장하던 효인이었다. 열심히 살아가던 나무에게 인생의 여유를 강조하였고, 나무의 꿈을 욕심으로 여겼으며, 나무의 능력을 우연으로 단정 지었다. 그럼에도 나무가 효인이와 사귀었던 건 가끔씩 보였던 효인이의 진심을 무시하지 못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나무의 미련 때문이었다.


자신의 뾰족하기만 한 지적에도 바뀌지 않던 나무에게 흥미를 잃어가던 효인이는 한동안 연락을 뜸하게 했었고, 어느 날 나무에게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효인이는 자신의 제안을 나무가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웃으며 농담처럼 다음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려면 너 자신에 대한 애정을 좀 내려두라는 훈계를 하며 뒤돌아서갔다.


효인이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나무가 효인이 자신보다, 나무 스스로를 더 애정하는 모습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온갖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던 나무의 마음이 기분 나빴음을 인정해야 했다.


***

나무는 너무도 예쁜 하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오늘의 구름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고, 햇살은 쉴 새 없이 반짝이며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멍하게 앉아있었던 나무는 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잊을 만큼 그렇게 그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무의 팔을 살짝 쳤기에 나무는 깨어났다. 그 순간에서 깨어났다는 표현이 정말 맞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나무는 작은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무도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를 바라만 보았다. 아이가 혹시 실수로 나무랑 부딪혔을지도 몰랐으니까. 나무는 살짝 미소를 짓고 다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아이가 다시 나무의 팔을 살짝 두드렸다.


“왜 그러니?”


“이거요. 이거 하나 줄게요.”


아이가 내민 손 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빛 동그란 사탕이 있었다.


“어? 아니야. 나 안 줘도 돼.”


“기분이 안 좋을 땐 맛있는 사탕 먹으면 좋아져요.”


나무는 아이가 별 뜻 없이 건넨 말에 자신의 기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무는 어젯밤 그 꿈을 되새기고 있었다. 모든 장면이 떠오른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해하고 있었다. 왜 꿈속에서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다녔는지, 옳고 그른 것을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결국에는 암담한 선택에 놓인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워 꿈이었음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효인이와 헤어지고 나서, 나무는 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순간적인 추억에 빠져, 효인이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었던 건 아닌가 하는 감상에 젖기도 했었다. 분명 이별의 부작용이 만든 오류였을 거였다.


어젯밤 꿈 덕분에 나무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과 효인의 관계를 그때 멈출 수 있어서, 결국 그런 결말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자신의 선택이 결국 그런 결론이라면 나무는 그게 누구라도 선택하지 않을 거였다. 이 장면을 누군가의 계시로 여겨야 된다면, 나무는 꿈에서 본 장면을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 무시하지 않을 거였다.


나무는 자신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는 아이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향해 웃었다.


“누가 그런 말 해줬어?”


나무는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 나무는 신기하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위로라고 해도 될지 모를 마음이었지만, 순간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괜찮아지고 있었다. 한낱 꿈속의 감정이었지만, 나무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


“네 것인데 내가 먹어도 될까?”


아이는 나무의 말에 어깨에 사선으로 맨 작은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무는 웃음이 나왔다. 눈물도 나왔다. 그 안에든 사탕들이 너무 예뻐서 예상치 못한 눈물이 흘렀다.


“어.. 미안.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나무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더 나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나무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조그마한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나무는 다시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도 나무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아이는 혀를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변해있었다.


“사탕 먹으면 요렇게 되니까 먹어봐요.”


아이는 자신의 입속의 색을 나무에게 자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겼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래도 사탕 먹고 이 잘 닦아야 해.”


나무는 아이가 전해준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달해서 상큼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나무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 나무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가 그런 것처럼 혀를 내밀었다.


“노란색이니?”


“아직 아니에요. 조금 더 먹어야 돼요.”


나무는 아이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이 동네 사니? 다음에 만나면 내가 맛있는 사탕 사줄게.”


“음... 이 동네 살진 않아요. 그런데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사탕 꼭 사주세요.”


아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말을 전했다. 아쉽거나 슬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이다운 얼굴도 아니었다.


“그럼 약속 정할까? 언제 시간 되니?”


“음... 그냥 만나게 되면 사주세요.”


 아이는 금세 커버린 것 같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눈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무는 아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름이라도 말해줘. 이름이 뭐야?”


“서여름”


“이름도 예쁘네. 내 이름은 이나무..”


입에 들어 있는 사탕 덕분인지 하얗게 쌓여 있는 구름이 아이스크림처럼 달달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옆자리.. 아이는 가고 없었다. 나무는 아이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굳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진 않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다시 꿈이었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잊고 싶지 않았다. 입안에 남은 달달한 맛을 기억하며, 나무는 그곳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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