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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슬머리 Oct 25. 2024

17. 선물 개봉

*

“나무야, 나무야, 엄마 소리 들려?”


나무의 움직임에 엄마는 나무를 불렀다.


나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물이 담긴 엄마의 눈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이, 너무도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가 꿈인 것 같아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꿈이 아니었다.


“이나무, 엄마 아빠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이 녀석아..”


아빠는 혼내듯 말을 해놓고는 눈물이 흘러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어디예요? 제가 왜 여기 있어요?”


나무는 깊은 잠을 잔 것 같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었지만, 아직 어떤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 안 나? 네가 난간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학생을 도와주다가 힘이 안되어서 같이 떨어졌어. 다행히 상가의 천막과 쌓여 있던 화장지 더미 쪽으로 떨어졌는데, 둘 다 다친 곳도 없었는데, 네가 안 깨어나잖아.”


나무는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나무를 보고 안심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에 나무는 살며시 웃었다.


“너보다 큰 아이를 무슨 힘으로 돕는다고.. 하여간 아무 일 안 생겨서 다행이지. 나무야, 누군가를 돕는 건 좋은데, 위험한 건 하지 마. 좋은 일 한 너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아빠는 깨어난 나무였기에 안심이 되면서도 혹시나 잘못되었을 상황을 상상하면 무서웠고, 나무의 용기를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나무의 행동은 혼을 내야 했다. 잔소리였지만 그 본질은 사랑이었다.


“나무야, 어디 아픈데 없지?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엄마는 나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나무에게 물었다.


“아빠, 엄마. 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나무의 마음 한구석이 찌릿거렸다. 아픈 건 아니었다. 뭐라고 꼭 집어 설명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감동.. 감동이었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이나무, 내가 너 때문에..”


나무는 자신에게 다가온 누군가를 한참 보고 있었다. 나무는 다가와 자신을 안으며 우는 사람을 기억해 내기 위해 겨우 떼어내어 얼굴을 보았다. 라임이었다.


“뭐야? 나 잊은 거야? 왜? 어머니, 나무 머리에 아무 문제없다고 했잖아요?”


눈물범벅인 라임이는 자신을 기억 못 하는 듯한 나무의 눈빛이 당황스러워 나무의 부모님을 번갈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라임.. 진짜 라임이야? 라임아..”


나무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자, 이제는 라임이의 행동이 어색해지고 있었다.


“야, 너 왜 그래? 오랜만에 보는 사람처럼..”


라임이는 다시 나무의 부모님을 바라보며 나무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몰라했다.


“라임아..”


한참을 울던 나무는 라임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당황스러워했다. 왜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처럼 반가워하고 그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라임이가 자신의 옆에 있어서 좋았다.


**

깨어난 나무는 내일까지는 병원에 있어야 했다. 3일간 깨어나지 않아 걱정이었기에, 이왕 입원한 김에 몇 가지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나무의 부모님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라임이가 나무의 옆에 있기로 했다.


“라임, 넌 여기 있어도 괜찮아?”


나무는 라임이가 남아줘서 좋았지만, 괜히 바쁜 라임이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라임이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우리 학원 건물에서 그랬잖아. 네가 오기로 했는데, 안 오는 거야. 그런데 옥상에는 왜 올라간 거야?”


라임이는 그 건물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취업준비로 마음의 안정을 잃을 때마다 나무는 라임이를 찾아갔었다. 그날도 라임이를 만나러 갔었고, 오지 않는 나무에게 전화를 걸었고, 듣게 된 소식에 자신의 탓인 듯 울며 병원으로 달려온 라임이었다.


“전화를 받으러 올라간 거였어..”


전화가 와서 옥상으로 바로 올라갔던 거였다.


“누구 전화였는데?”


나무의 전남자친구인 나효인의 전화였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말이 그들 만남의 끝이었다. 서로의 소식을 굳이 전하지 않았고 ,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무야, 난데.. 혹시 들었어?”


얼마 전 들려온 효인의 소식. 효인이 조만간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나무에게도 도착했었다. 다들 나무랑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결혼 소식에 다른 이들의 짐작이 덧붙여져 내용이 부풀려졌고, 효인이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었다.


나무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효인이에게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내가 결혼을 하는데, 너랑 헤어지고 만난 사람이야. 다들 오해를 해서.”


나무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전화를 한건 아니었을 거였다. 억울한 자신의 입장에 나무의 한마디가 필요한 듯 느껴졌다.


“알아. 그러니까 걱정 마.”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말해서 미안했다.”


누군가를 만나려면 너에 대한 애정을 줄이라는 주제넘은 발언. 나무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었다.


“괜찮아. 결혼 축하해.”


“어. 그래. 잘 지내라.”]


그렇게 끝난 통화였다. 그때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나무였다. 굳이 1년 가까이 끌었던 관계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어리석었던 자신을 감싸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 들린 누군가의 외침. 도와주세요..


기억을 떠올리던 나무는 라임이의 전화벨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 왜?”


라임이는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떻게 알았어? 아.. 전화까지 주고 고맙네. 끊어.”


나무는 라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임이를 처음 만난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나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누구야?”


“우리 오빠. 너 깨어났다는 소식 듣고 전화했다고..”


나무는 라임이의 오빠가 어떻게 자신의 소식을 알고 전화를 했는지 의아해 라임이에게 물었다.


“너, 이 병원에서 유명해. 학생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다고. 너랑 같이 떨어진 남학생이 울면서 너 잘못될까 봐 어찌나 묻고 다녔는지..”


라임이의 미술학원 건물에 있던 수학학원에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고 했다. 나무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냥 떨어졌을 거라고, 나무의 순간적인 판단과 예상치 못한 힘에 천막과 화장지 더미 위로 떨어졌다고. 깨어나지 않은 나무를 걱정하며 병원을 몇 번이고 온 남학생이라고 했다. 큰 덩치와 달리 겁도 많았고 눈물도 많았던 남학생 이야기를 하며 나무와 라임이는 웃었다.


“그런데, 네가 말한 건 아니잖아?”


“아, 우리 오빠 친구가 이 병원에 있거든.”


나무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

라임이가 돌아간 후, 나무는 멍하게 알지 못하는 생각들 속을 헤매고 있었다. 꿈 같은 지금의 자신의 시간들과, 너무도 생생했던 꿈 속에서의 슬픔에, 뭐가 진짜인지 헷갈리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떨어지면서 진짜 표시 안 나게 머리가 충격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어수선한 마음을 붙잡고 싶어 병원 건물 밖으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기분은 상쾌해졌다.


“안녕하세요.”


나무는 인사를 전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본 누군가가 나무를 보고 웃고 있었다. 볼에 살짝 생긴 보조개가 그 웃음을 더욱 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 네..”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 봤지만, 이미 아는 사람 같았고, 낯선 이를 경계해야 했지만,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공간을 허용해주고 싶었다.


“라임이 친구시죠? 제 친구 동생이 라임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신록이 친구, 서예찬이라고 합니다.”


나무는 좀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그래서 나무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예찬이에게, 예찬이가 자신에게 그러듯이 웃었다.


예찬이는 전해 들은 나무의 용기가 놀라웠었고, 라임이의 친구라는 말에 한 번도 만나적 없었지만 친근했었고,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는 소식에 걱정을 했었다. 병동에 퍼진 나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안심이 되었고, 만나게 되면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다. 우연히 들여다본 병실에 멍하게 앉아 있던 나무였고, 밖으로 나가는 나무가 걱정이 되어 따라 나온 예찬이었다. 처음 본 나무였지만, 마음으로 전했던 걱정 때문이었는지 반가웠고, 다행이었고, 마음이 쓰였다.


“컨디션은 괜찮아요? 다들 나무씨가 안 깨어나서 걱정했어요. 특히, 그 남학생과 라임이가 어찌나 온 병원을 울고 다녔던지.”


예찬이는 그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나무는 그런 예찬이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듯한 그 미소가 자꾸만 마음에 남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긴 잠을 잔 느낌만 들어요. 당연히 컨디션은 좋고요. 제가 가끔 스트레스를 잠으로 풀기는 하는데..”


괜한 말을 덧붙인 것 같아 나무는 다시 웃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예찬이의 시선을 애써 못 본채하며 나무는 멀리 시선을 던졌다.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잠도 좋을 것 같네요. 저는 혼자 자주 걸어요. 좋은 풍경 보고 감탄하고.. 그러다가 지쳐 잠에 곯아떨어지긴 하는데.. 결국 무엇으로 해결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민망해하며 웃는 나무를 바라보며, 예찬이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고, 자신의 말에 다시 나무가 웃자, 그 웃음과 함께 웃을 때 사라지는 나무의 눈에 마음이 갔다. 예찬이는 나무의 그 웃음이 좋았다.


나무는 예찬이의 말을 들으며, 다음에는 자신도 혼자 걸어보는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건강 잘 회복하세요.”


나무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예찬이는 그 순간을 마무리하고 일어섰다.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세요.”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예찬이에게 나무도 인사를 건넸다. 알지 못하는 그가 행복하길 바라며. 나무는 자신에게 생겨나는 예찬이를 향한 호감을, 깨어난 후 가지게 된 세상을 향한 호감이 너무 넘쳐났기에 나누어진 마음이라고 짐작했다. 아님 예찬이의 선한 웃음, 그러니까 웃을 때 생기는 볼의 보조개.. 그 어디쯤에 있는 호감이라고 생각했다.


****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무는 집안 곳곳에서 느껴진 행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설명할 수 없는 설렘은 자꾸만 나무를 울컥하게 했다.


“나무야, 점심 먹자.”


나무는 주방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곳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나무의 건강이 아무 문제없음을 확인한 아빠, 엄마는 나무를 집 앞에 내려두고 자신들의 일정을 위해 다시 차를 돌려 나갔다.


혼자 집에 들어간 나무였고,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나무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나무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눈물이 나고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나무, 잘 다녀왔어?”


나무를 향해 웃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무는 더 행복해졌다.


“나무야, 너 좋아하는 계란찜 해놨어. 얼른 밥 먹자.”


나무는 식탁에 앉아, 할머니가 준비해 주신 점심을 먹었다.


자신이 들어가 있는 장면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상하게 조금 낯설었고, 말없는 순간의 정적이 약간 어색했지만, 할머니의 눈빛은 너무도 따뜻했다.


“할머니, 아빠가 혹시 계란말이 좋아해요?”


나무는 계란찜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고, 갑자기 든 생각에 할머니에게 물었다. 왜 그런 궁금증이 생긴 지는 몰랐지만, 순간 궁금했다.


“아니, 너의 아빠도 계란찜 좋아해. 너 아빠 닮았잖아.”


할머니는 나무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잠시 멈춰 있었다.


“아, 내가 예전에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자주 해준 적은 있었지. 나중에 그러더라고 계란찜이 더 좋다고.”


할머니는 예전의 추억들로 행복해 보였다. 반찬하나에 떠오른 추억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게 해 준 것 같았다.

“할머니, 무슨 재밌는 생각을 하시길래 행복해 보일까요?”


나무는 할머니의 생각이 궁금해 웃으며 물었다.


“그때의 우리 승호 생각. 모든 게 고마워서.”


할머니의 눈빛이 반짝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무는 다시 계란찜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계란찜에 나무도 행복해졌다.


나무는 설거지를 한 후, 조용한 거실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할머니는 반짝이는 따뜻한 햇살 아래에 잠시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긴 것 같았다. 얼굴에 미소가 살짝 생겨나는 모습에 나무도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움직여 소파에 기대어 앉은 나무는 한쪽에 보인 액자에 눈길을 돌렸다. 엄마의 사진이었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 얼굴의 엄마와 조금은 해맑아 보이는 외할머니의 사진이었다. 한참을 보던 나무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 사진 속 엄마와 외할머니가 행복해 보여서 , 다행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하며..


나무는 감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세상 모든 것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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