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민 Oct 22. 2021

밥 같이 먹어주는 고마움

오후 5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나랑 밥 같이 먹어줘서 너무 고마워." 이른 점심을 먹은 탓에 배가 고프다며 밥 먹으러 가도 되냐고 묻는 말에 흔쾌히 그러자고 말했더니 내게 팔짱을 끼던 동생이 던진 말이었다. "오늘은 왠지 나도 출출하던 참이었어. 이상하지? 난 점심도 잘 먹었는데. 우리가 통했나 봐." 고맙다는 말에 나는 이렇게 화답했고 우리는 깔깔거리고 재잘거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돌솥밥을 시켜서는 따뜻한 물을 부어 누룽지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운 우리는 흡족한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는 먹으면서 맛있다는 말도 연신 내뱉었을 것이다. 우리는 전부터 먹는 코드가 맞았다. 특별한 취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뭐든 선택한 메뉴는 맛있어하는 '쉬운 입맛'의 소유자들이라고나 할까?


웬만하면 맛있게 먹는 것. 이게 뭐 그리 어렵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천차만별의 식성을 보게 된다. 남편만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맛있다고 하는 음식이 없을 정도로 식성이 예민한 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간을 잘 보는 편이라 스스로를 미식가라고 여겼었지만 성인이 되어서 그 생각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내가 맛집이라고 소개한 음식점에서 음식을 담담히 먹는 남편을 보면서, 그런 또 다른 지인들을 보면서, 내가 아무거나 맛있다고 잘 먹는 먹성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둘이 만났으니 우리의 메뉴 선택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 되었고 우리는 늘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던 거 같다. "오늘 메뉴 진짜 잘 골랐다. 언니 덕분이야." "아우, 진짜 맛있게 잘 먹었다. 네 덕분이야." 우리의 메뉴 선택은 정답이 모두 다인 선다형 문제를 푸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서로의 선택에 감탄했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니 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너무 많이 주문하는 거 아닐까?"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는 시킨 음식들을 깨끗하게 싹싹 비워냈다. 그러곤 빈 그릇들을 보며 깔깔 거리며 웃는 것이다. "이것 봐. 또 다 먹었잖아. 우리 다시는 못 먹을 거라는 괜한 걱정 하지 말자. 우리는 늘 가능하다니깐." 우리는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언니 동생 사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아이 덕분에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아이들은 크면서 서로 취향에 따라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지만 아이들과 상관없이 우리는 점점 더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서 다시 학창 시절 때 같은 우정의 관계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결혼을 하면서 각자 여기저기로 흩어져 살게 된 친구들은 자주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고 어린아이를 키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었다. 주변에 사는 이웃 엄마가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우정의 관계는 번번이 실패할 때가 많았다. 엄마들의 사회생활은 냉혹하고 매서운 부분이 많았다. 무리가 생기는 곳에서는 언제나 갈등과 분쟁과 이탈과 시기와 질투들이 난무하는 것 같다. 거기에 가끔 위계질서까지 원하는 무리도 있었다. 게다가 개인의 몸도 아닌 아이를 내세운 엄마들의 전쟁터에서 난 여러 번 아픔도 겪고 여러 번 따스함도 느꼈다. 나는 육아를 하면서 엄마들의 사회생활이 직장 생활보다 훨씬 치열하다고 느꼈다. 자식의 일은 곧 엄마의 일로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았고 엄마 사이의 일로 끊어지는 관계도 많았다. 독특한 개인적 취향은 마녀 사냥 대상이 되어 무리에서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나는 이 전쟁터 같은 곳에서 '다름'을 뼈저리게 배웠다. 직장 생활을 할 때가 오히려 쉬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던 이유는 직장에서는 일만 잘하면 별로 문제 될 게 없었고 위계질서가 있었기 때문에 - 엄마들의 무리에서도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곳이 있었지만 모두의 인정을 받는 직장에서의 직급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 무리가 어느 정도 통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한 곳에 정착한 엄마들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나를 생각하며 실소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만들어온 가치관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세계에서 다름의 간극의 크기를 비로소 실감했던 것이다. '다름'은 힘이 있는 무리로부터 배척당하게 했고 '다름'은 '이상함'의 동의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가끔 어린아이를 볼모로 내쳐지지 않기 위해 애썼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지금이 얼마나 평화의 시기인가를 생각하며 안도하게 된다. 나 혼자 개인의 문제였다면 무리로부터 배척당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그만일 문제였다. 그러나 아이와의 결부는 달랐다. 나는 첫 배척 경험 당시 아이와의 추억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함께 놀러 다니고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집을 방문하던 사이가 한순간에 남이 되는 경험을 나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금세 잊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난 아이 때문에 아이가 더 이상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슬펐고 여행 사진을 보며 행복하게 추억할 수 없음이 서글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 추억에 연연했을까 싶지만 그 당시에 나에게 그 일은 첫 경험이었기에 쓰나미급의 일이었다.

늘 현재 진행형이 아픈 법이다. 겪어야 할 일들은 겪어내야 지나간다. 나는 그 사실을 아는 게 서글퍼질 때가 있는데, 나쁜 일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오고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올 수도 있다는 삶의 이치가 겪는 동안에는 하나도 위로가 되어주질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그 이치를 생각할 여유를 찾는다. 그러니 삶이란 매 순간 힘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배움이 많고 깨달음이 많아도 매번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파도가 치면 파도에 나를 맡기고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이 바로 삶이었다.


나는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우정의 관계를 성인이 된 지금 찾는 것이 과연 옳을까 싶어 졌지만 내가 상처 받을까 봐 만남을 꺼리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언제든 찾아온다는 것을 배웠다. 숱한 만남 중에 한 두 명쯤은 나와 코드가 맞고 생각이 맞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옳고 그름을 내려놓았다. 인간관계는 옳고 그름으로 해석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관계였다. 이 거대한 다름의 집단에서 얼마나 나와 잘 맞는가가 인간관계를 결정하는 요소였다.


얼마 전 심하게 아프고 난 뒤로 나는 식욕을 잃었다. 식욕을 잃고 나니 삶의 기쁨 한 가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아무거나 잘 먹던 내가 먹질 못하자 우울한 마음이 나를 덮었고 먹질 못해서 기운이 없어지며 악순환의 고리는 형성되었다. 한 순간이었다. 사람이 피폐해지는 것이. 나는 이를 악물고 먹으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였다.

친한 동생이 밥 이야기를 했을 때 갑자기 식욕이 돌면서 맛있게 밥을 먹고 나자 나는 '같이 밥 먹어주는 고마움'을 떠올리게 되었다. 함께 밥을 먹으면 입맛을 돋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아무거나 잘 먹는 사람이 그랬다. 가리는 거 없이 잘 먹고 양껏 잘 먹는 사람. 요즘 먹방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거 같다. 복스럽게 잘 먹는 사람을 보면 나도 식욕이 셈 솟는 것을 느낀다.

나는 입병이 나도 웬만큼 아파도 아픈 것을 이길 정도로 밥을 잘 먹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 내게 고마워하던 동생에게 내가 더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졌다. 밥 같이 먹어줘서 고맙다는 말이 오래도록 내 귓가를 울렸다. 함께 밥을 먹어준다는 건 단순히 밥을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서로를 포용하는 일이 아닐까? 배불러도 한 끼 더 먹어주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메뉴도 맛있게 먹어주는 것. 배려의 최고 난위도 단계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먹는데 소비한다. 팬데믹이 장기화되며 주부들은 밥 차리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호소한다. 돌아서면 밥이라는 뜻의 '돌 밥'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다. 밥을 먹지 않으면 삶은 정지될 수밖에 없기에 밥을 먹는 활동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밥을 차리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는 평가절하되는 것이 현실이다. 팬데믹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노동의 강도는 더 커졌고 가치 평가는 여전히 야박하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커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식욕을 잃게 되면서 식욕이 왕성하던 때가 더없이 그리워졌고 먹는 활동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굉장히 큰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로서 아이가 밥을 잘 먹어야 나의 일을 다 해낸 것 같은 안도의 마음이 느껴지듯 밥은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한 동생을 만나러 나서기 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는 내게 전에도 하곤 했던 질문을 던진다.

"누구 만나러 가?" "에이, 엄마는 친구가 없네. 친구 아니고 동생이잖아."

"아닌데. 친군데. 어른이 되면 나이 차이 같은 거 아무 의미도 없어. 동생이지만 엄마한테는 친구야."

아이는 동갑이어야 친구라는 관계가 성립하는 세계에 서서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해줄게 하며 방을 나간다.

'네가 엄마 나이가 되면 이해하게 될 거야. 언니라고 뻗대 봐야 더 나은 것도 없는데 굳이 언니 노릇하느라고 힘들 필요 없다는 걸. 엄마는 동생이라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 언니라도 못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야 관계들이 편해졌어. 만나면 편한 관계가 친구지. 뭐 더 있겠어? 거기에 나랑 밥 같이 먹어주는 사람. 그게 친구지.'


"언니가 정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정말 우리 선택은 최고였어."

항상 내 얘기에 공감해주고 내 선택에 옳다고 말해주는 동생.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간혹 있는 우정의 관계를 찾았고 그녀의 긍정 에너지 덕분으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먹는 코드가 맞는 사람이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Pixabay.com
이전 09화 따뜻한 나의 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