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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Oct 22. 2021

한 사람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의 제기할 수 없는 불평등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운명의 불평등. 그리고 사실 하나, 어떠한 이념도 이 땅에서 완전한 평등 사회를 결코 이룩해 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그러니 완벽한 평등을 요구할 수도 없고 운명의 불평등을 따질 수도 없다. 삶은 처음부터 불평등 위에 세워져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스타트 라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본다. 다른 스타트 라인에 서서 출발한다는 건 굉장히 큰 불평등이다. 우리는 그 불평등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기질을 통해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한참 뒤쪽에 그어진 스타트 라인에서 앞서 달려가는 사람들은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고 뒤에 오는 사람들을 보기에는 달려갈 길이 벅차게만 느껴진다. 

처음부터 스타트라인이 달랐던 그들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그들의 게으름 탓이라고,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고, 극한 상황에서도 노력해서 일어난 사람들을 보라고 - 극한 상황에서 일어서려고 애쓴 사람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겠는가 -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이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면 자신의 에너지를 그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하지 말고 감사하는 데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스타트 라인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행복은 만족이다. 각자 다른 출발선에서 출발하여 각자 원하는 목표지점까지만 달리고 멈추어도 괜찮다.


나는 불행의 크기가 현재 진행형이냐 완료형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형일 때 가장 커 보이다가 완료형이 되면 작게 느껴지는. 소나기가 내릴 때는 소나기를 피할 곳이 필요하다. 우산이 필요하다. 소나기가 그친 뒤에는 우산이 필요 없다. 한낮의 열기를 식혀준 소나기의 시원함을 좋았었다고 감상할 뿐이다.

완료형의 관점으로 본다면 불행도 마음먹기 달린 것 같다. 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게 느껴지듯 그때에는 여유 있게 나의 불행을 감사하게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불행 중에 있을 때 불행을 어떻게 잘 견뎌 내느냐는 것이다. 견디는 것은 아프고 힘들다. 끝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평등이었던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불행도 겪게 하고 행복도 겪게 한다. 불행인 줄 알았던 것이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을 통해 행복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불행을 겪으며 성장하기도 한다.

큰 불행을 겪고 나면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아침에 따뜻한 햇살만 비춰도 기분이 좋고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이 불어서 기분이 좋다. 비가 오는 날은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으니 더 좋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날 높고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은 한순간도 똑같은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다채로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그 변화무쌍한 하늘만 봐도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행복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열아홉 살 때 나는 빨리 스무 살이 되길 바랬다. 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다. 스물아홉 살 때 나는 서른 살이 천천히 오길 바랬다. 서른 살은 조금 두려운 나이로 느껴졌다. 서른아홉 살이 되었을 때 마흔 살이 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았다. 나이가 드는 건 조금 서글퍼지는 일이긴 했다. 늘어나는 흰머리와 줄어드는 머리숱, 불어나는 나잇살과 줄어드는 근육과 피부 탄력. 아마도 서서히 나는 나이 들어가면서 순간순간의 나에 익숙해지며 쉰 살을 맞이할 것이다.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쉰 살이 된다면 잠에서 깨는 순간 난 비명을 질러댈 테지만 천천히 변화된다면 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마흔 살 고개를 넘으며 맞이하게 된 큰 변화가 있다.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고 내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나름 '깨달음'이라 정의했다. 하루아침에 쉰 살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안에는 이미 삶에서 얻은 다양한 앎들이 있었고 내 안에 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마흔 살이 되던 어느 날부터 하나하나 내 속에서 깨어나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오래된 일기장을 보다가 나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무 살 때 이미 나는 지금 깨달은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를 다시 바라보니 나는 꽤 현명하고 영리했던 사람이었다고 느껴졌다. 그저 머릿속에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어리숙했고 실수 투성이었던 거 같았는데 말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뼈저리게 느낄 만큼 삶의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었나 보았다. 마흔 살은 내게 그것을 말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과거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면서 불행의 시간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후부터 몇 년 동안 나는 나의 불행들을 재정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힘든 순간 항상 내 곁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최근에 다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함께 했던 기즈키를 잃은 나오코는 세상의 전부를 잃었다고 말했던가.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전부를 잃었고 나의 상실은 너무나 커서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게는 어떤 어른도 없었고 나는 혼자 살아내거나 혼자 포기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다. 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었고 그것은 내 곁에 항상 있어주었던 '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나는 혼자라고 느꼈지만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항상 내 옆에는 '한 사람'들이 있었다. 글에 기록된 '한 사람'들과 미처 글에 기록되지 못한 '한 사람'들까지. 그들은 내 인생에 선물이었다. 오래 머물렀다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잠깐 머물렀다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에게 욕심부린 적이 있다. 그 사람을 온전히 다 소유하고 나면 나의 외로움이 채워질 줄 알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 사람은 아무리 내게 최선을 다해도 나를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나고 나니 그것이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절박하여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해 집착하고 사람이 떠나가면 슬퍼하는 것. 사람이 떠나가지 못하게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것. 그 당시 나는 삐뚤어진 방식으로 사람들을 관계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외로움은 사람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삶의 순간순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 인해 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누군가가 있었고 누군가의 영향으로 내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살아낸 것이었다. 나는 살아낸 것뿐이었는데 삶은 내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내가 삶을 살아내지 않았다면 나는 삶의 불평등만을 배운 채 아무 의미 없는 채로 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준 사람들이 있었고 난 나에게 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평생 갚아도 갚을 길 없는 고마움을 받았고 살아내는 방법과 힘을 얻었다.

이제는 사람이 내게 머물다 떠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떠나가는 건 슬프지만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 사람과는 현재를 즐겁게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것.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내 곁에 존재했다가 다른 이들 곁으로 떠나간다는 것. 나도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그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만나지 못하는 고통과 소통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알았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소통하며 살아야 행복하다. 잠시 혼자 머물다 시끌벅적한 삶으로 들어가야 사는 맛이 느껴진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야 하고 관계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하다 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나와 관계 맺기를 잘 해낸 사람만이 타인과도 관계 맺기를 잘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관계에 연연하며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해서 관계에 집착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항상 타인에게 잘해줬고 내 내면의 모습을 감춘 채 살아갔다. 상처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늘 나의 운명적 불평등만을 바라보았고 나의 불행만을 바라본 셈이었다.


나는 혼자 살아낸 것이 아니란 사실을 통해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나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던 친구의 아픔을 통해 나의 불행을 팔아서라도 친구를 일으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불행을 감사하는 경험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행복했었다고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약해지면 그 틈을 타고 상처는 나를 유혹할 것이다. 나에게 나쁜 생각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자라온 환경은 물론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니 부모의 역할은 어마어마한 것이고 한 사람을 키워낸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이는 거저 자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의 불행은 좀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든지 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한 사람'이 내게 왔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내게 올 것이라는 사실을. 내 곁에는 든든한 가족과 좋은 사람 몇 명이 있어 내가 쓰러지려 할 때 나를 잡아줄 것이라는 것을. 그 마음은 너무나 따뜻하여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은 한겨울 아랫목의 두툼한 솜이불처럼 포근하게 나를 덮어줄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도 누군가에게 이불이 되어줄 차례라는 것을.

 

나의 과거 답사는 행복한 답사로 마무리되었다. 잠시 완료형에 속해 있다가 언제 다시 현재 진행형에 빠질지 모르지만 나의 행복 답사기는 완료형이 되었으므로 이렇게 마무리지어야겠다.




한 사람


울고 있을 때

소리치고 있을 때

주저앉아 있을 때

한 사람이 옆에 있어 주었다


가볍게 등을 도닥여 주고

함께 소리쳐주고

조용히 기다려주고

한 사람은 내 곁을 떠나갔다


다시 울고 싶어 졌을 때

소리치고 싶어 졌을 때

주저앉고 싶어 졌을 때

또 다른 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의 위로

한 사람의 기다림

한 사람의 일으킴


수많은 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나도 누군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내 심장은 마지막을 위하여 남겨질 수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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